사랑이여 우리들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서로서로 근심 걱정 나누며 살아 왔네.
근심걱정 나눌진대 그 무엇이 두려워 그대는 나의 생명, 나의 온갖 즐거움.
요즈음 작곡가 ‘베토벤’의 이름이 붙은 제목의 TV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음악가들의 색다른 이야기에 흥미를 갖는다. 그래선지 이래저래 베토벤의 이름이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베토벤은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 독일에서 활약하던 고전파 음악가로 봉건체제 속에서 가난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대의 신동 모차르트처럼 어려서부터 천재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기 때문에 부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20세가 넘어서야 비로소 당대의 대음악가이자 선배인 하이든에게 인정을 받아 귀족들의 후원을 얻게 됐고, 음악의 도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게 된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그는 음악적 재능을 꽃피우면서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음악가들은 귀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예속된 가운데 활동했으나 베토벤은 후원은 받아도 결코 예속되지 않았고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했다. 타협을 모르는 강한 자아의식에서 비롯된 성격도 작용했겠지만 남다른 철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평생에 걸쳐 가난과 질병과 고독, 많은 난관들로 괴로움을 겪어야 했지만 백절불굴의 투지로 극복한 영웅적인 기백이 있었으며,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간애를 실천한 인도주의자였었다. 그의 삶은 그대로 그의 음악에 반영돼 나타났다.
‘그대를 사랑해’ 이 곡은 그가 33세 되던 1803년, 헤르롯세라는 무명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단순 소박한 선율에 순수한 사랑을 표현한 통속적인 작품이다. 이때는 그의 작품이 초기를 벗어나 제2기로 접어들면서 자신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독창적인 시기였다.
헌데, 무뚝뚝한 성격이었던 그 답지 않게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은 물론이요, 당시 상황에서 볼 때 대중가요와도 같은 통속적인 노래를 왜 만든 것일까? 같은 해에 만든 ‘영웅 교향곡’과 연관해 생각해볼 수 있음직하다.
1803년, 그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민중의 권리를 옹호하고 자유정신을 기반으로 인민해방을 부르짖던 의회군대에 가담한 한 장군을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이웃나라 프랑스의 나폴레옹 장군이었다. 당시 베토벤은 이미 프랑스 대사관의 비서역이며 바이올린 주자인 루돌프 크로이처로부터 나폴레옹의 업적과 자유사상에 대해 자세히 들었고 플라톤 저서 ‘공화국’을 숙독하고 난 뒤였다. 그는 나폴레옹 장군을 흠모하면서 진정한 이 시대의 ‘영웅’으로 찬미하고 싶어졌다. 즉시 작곡을 착수한 것이 그 해 여름이었고, 이듬해 봄에 완성하게 된다. 스코어(총보)의 표지에 나폴레옹의 이름인 ‘보나파르트’라고 썼으며 밑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다. 즉시 프랑스 대사관을 통해 파리로 보내질 무렵,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공화국을 세우기는커녕 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리겠다는 소식에 분개한 베토벤은 그 악보의 표지를 찢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곡은 후세에 ‘영웅교향곡’으로 알려지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난세를 구원하는 영웅을 찬양하려고 작품까지 만들었던 베토벤의 실망감이 순수하고 소박한 사랑으로 마음을 기울게 한 것은 아닐까? 가곡 ‘그대를 사랑해’야말로 당시 베토벤 자신을 위로, 구원해줄 수 있는 그의 ‘영웅’이었을 거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