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예요. 바람이 들판의 풀꽃들을 잔잔히 흔들고 있어요. 햇살은 강물을 탱글탱글 윤나게 부풀려주고 강가에는 부들이 한껏 자라 올랐지요. 도요새 가족이 먹이를 찾아 거니는 들판에 우리 가족은 자리를 펴고 앉았어요. 우리 가족은 다섯이예요. 엄마, 아빠, 오빠, 언니 그리고 나. 여기는 그림책 속, 24쪽의 그림틀 안이에요. 그래요. 우리 식구는 그림책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이랍니다. 사실 나는 책의 내용도, 제목도 잘 몰라요. 이웃의 글씨 가족이 앞 쪽에 바글바글 살고 있지만, 그 이웃은 아주 무뚝뚝해요. 나는 글씨를 잘 모르는 어린아이고요. 항상 책을 보는 사람들이 어린 친구들인 것을 보니, 아마 이 책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책인가 봐요. 친구들은 나들이 나온 우리 가족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놀러나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부러워하곤 하지요. 그렇지만 말예요. 항상 매일같이 이렇게 놀기만 하는 저는 사실, 공부도 해 보고 싶고, 집 안에서 쉬고 싶을 때도 있어요.
책이 덮여지면 우리 가족은 23쪽 이웃과 마주치게 된답니다. 어느 날이었어요. 평소 말없던 이웃가족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옆 쪽 가족은 오늘도 여행만 하고 있다지? 저희들이 나들이 나왔다는 걸 알기나 할까?”
“허허, 그림들이 원래 다 그런 것 아니겠어? 그에 비해 우리 글자들은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 있지.”
“그런데 지호는 정말 공부를 잘 해. 저것 봐, 늘 책만 읽고 있지.”
“지은이는 참 예쁘지? 동생을 잘 돌보는 것 같아.”
“막내 말이지?”
나는 깜짝 놀랐어요.
‘형의 이름이 지호이고, 누나 이름이 지은이로구나!’
우리는 형제지만 서로 이름도 몰랐지요.
“참, 막내 이름이 뭐였지? 23 쪽에는 막내 이름이 안 나오더라고.”
“다른 쪽에도 막내는 이름이 없어. 그냥 막내라고 하더라고.”
이제까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요. 나는 그림틀의 한 귀퉁이에 뒷모습만 그려져 있어요. 사실 막내라기보다 이름이 없다고 해야 정답이지요. 나는 고개를 푹 숙였어요.
다음날, 형과 누나에게 자기들의 이름을 알려주니까 깡충깡충 뛰며 좋아했지요.
“당장 그렇게 부르자꾸나. 이웃 글씨 가족에게 감사인사라도 해야겠는 걸?”
엄마, 아빠는 내 속도 모른 채 크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죠.
“그런데 우리 막내는 이름이 뭐라니?”
엄마가 물어보자마자 나는 얼른 ‘난 그냥 막내래요.’ 했어요. 머뭇거리면 내가 속상해하는 마음이 들킬까 봐서였어요. 아빠는 ‘오 그래, 막내는 아주 귀엽다는 뜻도 되지.’ 하셨죠. 내 기분은 생각도 않고요. 나를 좋아하는 누나 아니, 지은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지만, 누나도 내 기분은 잘 모를 거예요.
생각해 볼수록 나는 너무나 속상했어요. 우리 가족은 이렇게 매일 글씨들이 시키는 대로 나들이를 나가지만, 서로 자기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에요? 우리 가족은 언제까지나 글씨들이 하라는 대로 이렇게 놀아야하는 걸까요? 우리 가족이 나들이 여행 왔다는 것도 어쩌면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일인지도 몰라요.
나만 빼고 모두 마음껏 들뜬 마음으로 나들이를 했어요. 매일 매일 그렇지만 말예요. 반쪽만 나온 뒷모습이 그날만큼은 다행이었어요. 속상한 표정을 지어도 아무도 모르니까 말예요. 나는 그림틀을 발로 탁탁 쳤어요. 오늘만큼은 아름다운 들판도, 변함없이 맛있는 엄마의 도시락도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그림틀 한 쪽으로 반쪽이 걸쳐진 내 몸이 쏙 들어가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살짝 그림틀을 빠져나왔어요. 뒤돌아보았지만 내가 없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가족 나들이 그림이었어요. 어차피 이름도 없고, 앞모습도 없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거겠죠. 이웃 가족이 사는 23쪽으로 가면 소문이 날 것 같아 얼른 뒤쪽으로 돌아나갔어요.
그러자 비가 막 쏟아지고, 그 잔잔했던 강물이 출렁출렁 넘쳐나 있지 않겠어요? 돌아가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다가갔어요. 꼬마이긴 하지만 나는 겁쟁이가 아니거든요.
“큰 홍수로구나! 얼른 대피합시다!”
사람들은 아우성치면서 부지런히 어디론가 피하고 있었어요. 움직일 수 없는 이 사람들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더 이상 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자 안타까워졌어요. 우리 가족은 이미 피한 뒤인 것 같아요. 벌써 걷었는지 돗자리가 안 보였지요. 성난 강물은 따뜻한 햇살도, 살랑거리는 들꽃들도 온데간데없이 집어삼켰지요. 그런데 어디선가 조그마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그건 바로 도요새 가족이었어요. 너른 강 가운데 도요새 부부가 아가들을 꼭 그러안은 채 강물에 휩쓸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 아니겠어요?
“도요새님! 빨리 헤엄쳐서 나오세요!”
“움직일 수가 없어. 매일 물결에 시달리느라 지쳐서 도망갈 힘도 남아있지 않아.”
도요새 부부는 힘없이 말했어요. 아기 도요새들은 계속해서 울음만 터뜨리고 있고요.
이런 건 말도 안 돼! 힘도 없는 작은 새들이 왜 매일 이렇게 시달려야 하는 거죠? 그 때 좋은 생각이 반짝 떠올랐어요.
‘맞아! 다른 쪽으로 나가서 도요새를 구할 걸 가져와야겠다!’
나는 뒤 페이지로 얼른 넘어갔어요. 도요새를 구할 수 있는 그림을 찾아서요.
“도와주세요! 앞 쪽에서 물난리가 났어요!”
“우릴 보고 어쩌라는 거지?”
그림들은 나를 보면서 수군거렸어요. 아기 도요새들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쟁쟁했어요. 어느새 내 발걸음에도 힘이 빠졌어요.
바로 그 때, 책상 위에 그려진 연필을 발견했어요. 주인한테 말할 새도 없이 얼른 달려가 연필을 들고 나왔어요. 도요새를 구하는 것이 더 바빴기 때문이에요. 돌아오는 길은 너무도 먼 것 같았어요. 몇 번을 넘어졌는지 몰라요. 오로지 도요새 가족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서둘러 돌아오자 도요새 부부가 발을 동동 구르는 내게 말했어요.
“우리는 이런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니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지 말아라.”
아빠 도요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서둘러 연필을 잡았어요.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렸어요. 나는 도요새 가족 주위에 배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물에 휩쓸리지 않는 튼튼한 배를 빨리 그리느라 손이 아팠어요. 물이 넘쳐 들어오지 않게 뱃머리를 아주 높고 안전하게 그렸지요. 찢어지지 않는 튼튼한 돛도 달았어요. 드디어 완성!
“자! 이제 눈을 떠 보세요.”
벌벌 떨던 도요새 가족들이 눈을 떴어요. 도요새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나는 힘이 빠져서 털썩 주저앉았어요.
“고마워요. 우리를 구해 준 은인이신데 이름이라도 알고 싶어요.”
도요새 엄마와 아빠가 나를 보고 말했어요. 이름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또 풀이 죽고 말았어요.
“난 아무것도 아니예요. 이름도 없답니다.”
내 말을 듣고는, 도요새 엄마가 말했어요.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니요. 우리 모두는 누구나, ‘멋진 누구인가’랍니다. 당신 이름도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당신이 찾지 못할 뿐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물론이지요.”
“고마워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나는 얼른 다음 쪽으로 넘어갔답니다. 내가 ‘멋진 누군가’라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내가 도요새 가족들에게 굉장한 선물을 받은 셈이 아니겠어요? 다음 쪽으로 넘어가자마자 가득한 글씨들이 눈앞에 펼쳐졌어요. 나는 너무나 피곤해서 앉을 채로 잠이 들었어요. 소곤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어요. 벌써 주위는 어두워졌지요.
“갑자기 책 내용이 바뀌었다던데, 그게 사실이야?”
“앞 쪽에 배가 한 척 생겨났다더군. 그 바람에 다른 이야기로 바뀌었다더군.”
“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한 게지?”
“‘멋진 누군가’라는 괴상스런 이름의 사람이 그랬대. 그렇지만 이 책 어디에도 그런 등장인물은 없었다고.”
나는 숨을 죽인 채 화가 난 글자들의 이야기를 모조리 들었지요. 내가 그림책 속의 세상을 바꾼 것이었어요! 아까 그린 작은 배 한척으로 말이지요. 난 정말 ‘멋진 누군가’가 되어 있었어요! 글자들 사이에서 살짝 빠져나와 24쪽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뿌듯하고 신나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 날 이후로 나는 그림책을 돌아다니면서 그림들이 원하는 대로 바꿔주기 시작했어요.
“가만 놔 둬! 우린 책이 내용대로 그려져야 해!”
이웃 그림들은 참견을 했어요. 주위가 달라지자 울음을 터뜨리는 그림도 있었어요.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자 우리가 새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에 그림책 속 식구들은 모두 신이 났지요. 새로운 그림친구들이 자
꾸 자꾸 생기기도 했어요.
“늘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이야기를 만드니 정말 따분하다. 우리도 그림들과 함께 이야기를 바꿔 써 볼까?”
글자들도 발 벗고 나서서 이야기를 고치는 일을 도왔어요. 답답했던 건, 그림뿐만이 아니었던 거예요. 우린 글자들과 함께 의논해서 매일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써댔어요. 글자끼리 자리를 바꿔가면서 그림이 변하는 것에 따라 춤추듯 같이 변해갔지요. 그러다보니 매일 밤 그림과 글자들의 회의가 열리게 되었지요. 그림책 세상에 사는 모두가 행복하고 신이 났어요.
새로 변한 그림책을 어린 친구 하나가 처음으로 보게 된 그 날은, 우리 가족이 강가에서 물난리가 나기 전에 모든 동물 친구들을 대피시키는 이야기를 꾸민 날이었어요.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어린 친구 표정을 살폈어요. 아이는 곧 깔깔 웃더니 손뼉을 치면서 말했어요.
“아, 재미있다! 내가 꼭 원하던 대로 이야기가 바뀌었네?”
친구가 좋아하는 모습에 모두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우리가 만든 이야기는 이렇게나 멋진 것이었어요! 너무나 행복해서 엄마는 어느 샌가 손수건을 꺼내셔서 눈가를 훔치셨지요. 도요새들도 짹짹거리며 신나했어요. 글자들도 뿌듯함에 으쓱거렸죠. 비밀이지만, 나도 왠지 뭉클해져서 눈물이 찔끔 났고요. 이제 ‘멋진 누군가’는 내 이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름이 되었어요. 지금도 우리는 모두 ‘멋진 누군가’가 되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 떠나고 있어요. 혹시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추어보세요! 전에 보지 못하였던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을지도 몰라요. 그건 분명 글자와 그림이 함께 새로 꾸며낸 이야기일 거예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