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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아픈 역사가 만든 같고도 다른 노래

8>고향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 한 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쓰다. <정지용의 '고향'中>




우리 가곡 중에서 제목과 가사만 다를 뿐 똑같은 선율과 반주로 불리어지는 곡이 있다. 정지용작사의 '고향'과 박화목의 '망향', 이은상의 '그리워' 3곡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인 정지용과 박화목, 이은상이 쓴 시가 어떻게 똑같은 선율의 노래로 불리게 된 걸까? 우선 이 선율을 만든 작곡자 채동선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보자.

작곡자 채동선은 1901년 전남 보성군 벌교에서 태어나 순천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로 유학해 경기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1918년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고 음악의 길에 접어들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해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와세다대 영문과를 졸업했으나 음악에 대한 열정에 못 이겨 다시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됐다. 베를린 슈테르텐 음악학교에 입학,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고 1929년 귀국했다. 이후,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당시 일제가 금했던 한글을 사용하고 한복을 입는 등 일제에 대한 저항 정신을 기반으로 한 민족음악운동과 문예활동의 기틀을 닦게 된다.

1933년에 채 선생은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였다. 당시 누이동생인 소프라노 채선엽이 일본 유학중이었는데 그녀의 독창회에서 최초로 발표해 동경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노래는 참으로 오랫동안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을 뿐 아니라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한 감정을 아름다운 선율과 서정적인 음악의 세계로 재창조해내며 우리 민족에게 마음의 노래로 남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채 선생은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하게 됐다. 민족음악회의 결성과 합창 및 교향악 운동, 고려작곡가협회장, 고려합창협회를 결성해 지휘를 했고 민요와 판소리 등의 채보 및 합창편곡 등을 했다. 문학 활동에서도 한국문필가협회의 부회장, 문총부위원장, 국립국악원이사, 예술원위원 등을 역임하게 됐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고 1953년 부산 피난 중 아까운 52세의 나이에 급성복막염으로 타계했다.



한편, 정지용은 1930년대부터 우리나라 시단에서 빛나는 거목으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당시 납북사건으로 인해 그의 모든 작품사용이 금지됐다. 채 선생의 가곡 중에서도 정 시인이 작사한 곡의 가사를 바꿀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작곡자인 채 선생은 타계한 뒤였다. 그러자 그의 작품성을 알고 있던 많은 문인들이 이제는 거꾸로, 만들어진 곡에 새로운 시를 지어 붙이게 됐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대표적인 두 시가 박화목의 '망향'과 이은상의 '그리워'이다. 이후 이 두 곡이 주로 많이 불리어졌으나 1988년 3월 정지용의 모든 작품이 해금되면서 다시 정지용의 '고향'이 원곡의 가사로 복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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