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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독립을 기원한 외침에서 나오다

9>선구자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 온 것은 1900년을 전후로 기독교가 전래되면서부터이다. 이때 서양선교사나 천주교 신부들이 가져온 피아노, 바이올린 등과 같은 다양한 악기로 찬송가, 성가를 연주하게 되면서 서양음악이 소개됐다. 또 그들이 설립한 교회당이나 기독교계 학교 등을 통해 악기의 연주법이나 음악의 기초이론, 작곡법 등을 교육하게 되면서 점차 많은 음악가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이때는 일제의 강점기이므로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의 민족적인 전통음악보다는 서양음악을 장려했으며 학교를 통해 교육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작곡자들은 대체로 빼앗긴 조국과 두고 온 고향, 떠나간 임에 대한 그리움 등의 감정을 서정적이면서 애상적인 가곡을 많이 작곡하게 된다.

‘선구자’의 작곡자 조두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두남은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음악에 눈을 뜨게 됐고 6세 때에는 동네의 성당 신부였던 조지프 캐논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의 기초를 배웠으며, 후에는 숭실학교에 입학해 말스베리 미국인 선교사에게서 작곡을 공부했다. 이때 그는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와 바이올리니스트인 계정식, 작곡가 박태준 등과 음악활동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가 18세 되던 해에 그의 부친은 독립운동에 연루되어 투옥된 뒤 병을 얻고 세상을 떠나게 됐다. 부친을 여읜 후 깊은 슬픔과 삶의 의욕을 상실한 나머지 조두남은 만주로 유랑을 떠날 결심을 한다. 드디어는 21세 되던 해에 음악을 같이 했던 친구들과 소규모의 유랑극단을 만들었고 만주일대를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하게 됐다.

1933년 되던 해 그는 모란강 근처의 어느 허름한 하숙방에서 숙식을 하고 있을 때 남루한 차림의 윤해영이라는 청년이 찾아와 만나게 되었다. 윤해영은 ‘용정의 노래’라는 제목의 시를 내놓고 조국광복을 기다리는 노래를 꼭 지어달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조두남은 즉시 이 시에 곡을 붙였고 다시 찾아오겠다던 윤해영은 나타나지 않아 얼마 후 이 노래를 유랑극단에서 발표하게 됐다.

현재 용정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작사자 윤해영(1909~?)은 함경도 출생으로 젊어서 만주로 건너가 소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문학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행적은 당시의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겉으로는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한 것으로 보이나, 속마음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시를 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조두남은 해방 후에 ‘용정의 노래’ 제목과 가사일부를 수정하여 ‘선구자’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발표했다. 6.25 전쟁이 나고 그는 월남해 경남 마산에 정착하게 됐고 이후 피아노교육으로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다가 1984년 향년 72세에 타계했다.

‘선구자’의 가사 가운데에는 ‘일송정’과 ‘해란강’의 지명이 나오는데 ‘일송정’은 용정고개 이름이고 ‘해란강’의 강변은 독립투사들이 쉬어가던 곳으로 민족의 독립투쟁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며 웅장하고 씩씩한 기상을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이역만리 황량한 만주 벌판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 흘려 숨진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충정에 가슴이 뭉클함을 억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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