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풀 우거진 청산에 살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리라
이 봄도 산허리에 초록빛 물들었네. 세상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서 살리라이 가곡의 제목과 가사내용을 보면, 마치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살으리 살으리랏다. 청산에 살으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랏다’를 연상케 하는 것이 현대판 청산별곡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한 작곡자가 작사, 즉 시까지 지어서 작곡을 한 특이한 점도 있다. 왜냐하면 작사(시)분야는 시문학의 영역이므로 음악가가 시문학까지 두루 공부하여 깊은 소양을 갖춘 경우는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연준씨는 본래부터 시를 전공했고 작곡은 후에 공부했기 때문에 스스로 시를 지어 작곡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사실 김연준씨는 대학총장을 역임한 육영사업가로 더 유명하다. 일제강점기부터 격동기 시절을 지나오던 그의 파란 만장한 생애를 살펴보면 여러 분야와 영역에서 다재다능한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1914년 함북 명천에서 상업을 하는 부유한 집안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면서 부친이 설립한 유치원에서부터 음악을 시작했고 소학교를 거쳐 함북 경성고보를 다닐 때는 노래와 바이올린에 재능을 보였다.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함에 따라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당시는 음악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현제명 교수가 지도한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하는 한편, 교향악단에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별도로 성악가 안영세에게 성악을, 현제명교수에게는 작곡을 개인지도 받았다. 4학년 때는 1938년 첫 독창회를 가졌고 이북 고향에 가서는 자선 독창회를 열기도 했다.
졸업 후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미국유학을 준비했지만 세계 2차 대전이 준비되던 혼란기라 포기하고 만다. 그로부터 그는 1939년 25세 약관의 나이에 육영사업의 꿈을 갖고 서대문에 동아공과학원을 설립한다. 해방 후 정부수립 된 1948년에는 한양학원재단을 설립해 한양공대로 승격하게 된다. 이 후 오늘날의 종합대학으로 거대한 한양학원을 키우게 됐고 학장, 총장,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0년대부터는 대한일보를 창간해 언론계에도 발을 들여 놓는다.
그러나 언론은 정치와 함수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1973년 수재의연금 횡령사건에 휘말려 폐간을 당하고 그는 약 2개월간 영어의 몸이 된다.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고난을 모르고 살아왔던 그에게는 가장 혹독한 시련기이면서 자신을 돌이켜보게 되는 자숙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한동안 잊고 있던 시와 음악을 되찾게 됐고 종이와 펜이 없는 감방 안에서 떠오르는 시상과 악상을 잊지 않기 위해 암송하면서 벽에다 손톱으로 기호를 남기기도 했다. 무혐의로 자유의 몸이 될 무렵, 그 때야 차입된 종이와 펜으로 벽에 기호로 남아있던 곡과 가사를 옮겨 적었다. 이렇게 각고를 통해 탄생한 시와 곡이 ‘청산에 살리라’이기 때문인지 듣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깊은 사색과 감동을 주게 되는 것 같다.
“청산은 삶의 진실과 진리를 상징합니다. 세상이 변하여 나 자신을 욕되게 한다 해도 진리는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허무한 인간 세상에서도 늘 푸른 자연과 같이 진실한 이상향을 마음에 담고 살고 싶은 의지의 표상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에게 이순(耳順)의 나이에 찾아 온 혹독한 시련을 통해 오히려 더욱 값진 삶의 의미와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를 터득했음을 엿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