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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⑧ 우리 사상사의 ‘새벽’을 연 실천가-원효

왕·귀족 중심 불교, 대중화에 앞장서
생명에 대한 우주적 신뢰와 존중 지향


당나라로 가는 유학길 중 간밤에 맛있게 마신 물이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원효. 원효는 중국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 앞에서 강론하는 등 다양한 불교이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불교사상의 융합에 힘썼다. 또 당시 왕족과 귀족 중심이었던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스스로 승복을 벗고 ‘무애가’를 지어 부르기도 했다. 특히 모든 생명체에 대한 신뢰와존중을 바탕으로 한 '일심' 철학을 바탕으로 불교의 대중화에도 기여를 했다.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으며 한국의 불교사상에 큰 발자취를 남긴 원효의 삶은 석존(釋尊)이 보여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매력인
분황 원효(芬皇 元曉, 617~686)는 경북 장산(경산)군 자인현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새털’(아명 誓幢의 뜻 新毛)은 어린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諸行無常)는 도리를 뼈 속 깊이 체험했다. 때문에 그는 10세 미만인 ‘관채지년’(8~9세)에 출가하여 머리카락을 깎았다. 배움에 있어서 그는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았으며(學不從師) 깨침에 있어서도 그는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았다.(無師自悟)

그의 ‘발심수행장’에서처럼 젊은 시절 원효는 깊은 산속에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매력’을 보여주었다. 그 시절 영축산 반고사의 낭지대사는 그에게 ‘안신사심론’과 ‘초장관문’을 쓰게 해 주었다. 또 오어사의 혜공화상은 저술할 때마다 막히는 곳이 있으면 찾아가 토론을 하면서 길라잡이가 되어주었다. 어느 정도 공부를 마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살던 집을 초개사로 고치고 수행을 계속했다. 뒤이어 자신이 태어난 사라수 옆에도 사라사를 지었다.

때마침 현장(玄奘, 602~664)법사가 17년간(629~645)의 인도 유학을 마치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동아시아 불교계는 그가 소개한 새로운 유식학이 널리 성행하고 있었다. 650년 현장이 머무는 자은사 회상을 사모하였던 원효(34세)는 도반 의상(義湘, 26세)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떠났다. 경산을 떠난 이들은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와 여주 및 파주와 평양 그리고 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었다.

하지만 이들은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혔다. 가까스로 감옥을 탈출한 두 사람은 신라로 돌아왔다.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였다. 이듬해인 661년 6월 하순 원효(45세)는 의상(37세)과 함께 다시 유학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경산을 떠나 상주와 음성, 청주와 평택을 거쳐 화성을 향해 나아갔다.

인간의 보편성 ‘一心’ 발견
막 시작된 장마로 장대비가 그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원효와 의상은 청주 인근 산자락의 땅막에서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아침 다시 길을 떠난 이들은 이튿날 화성 남양만 인근의 무덤 속에서 또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을 자던 원효는 ‘통티’(動土)를 만나 벌떡 일어나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의상과 헤어져 신라로 돌아갔다.

“어젯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일컬어서 매우 편안했는데(前之寓宿, 謂土龕而且安) 오늘밤 잠자리는 무덤 속에 의탁하니 매우 뒤숭숭 하구나.(此夜留宵, 託鬼鄕而多祟) 알겠도다!(則知) 마음이 생겨나면 갖가지 현상이 생겨나고(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心滅則龕墳不二) 또 현실 세계는 오직 마음이 만들어 내고(又三界唯心) 모든 현상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萬法唯識) 마음 밖에 현상이 없는데(心外無法) 어찌 따로 구할 필요가 있으리.(胡用別求)”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우주적 마음(一心)을 발견한 이후 그의 삶은 이전과는 달리 새롭게 펼쳐졌다. 개인적 깨달음을 얻은 원효는 신라의 서라벌로 돌아왔다. 곧바로 그는 귀족과 왕실 중심의 불교를 서민과 저자 중심의 불교로 옮겨놓기 시작했다. 원효는 ‘시경-빈풍’의 ‘벌가’시를 패러디하여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는가. 내가 하늘 떠받친(칠) 기둥을 끊(깎)으리”라며 ‘풍전’(風癲)시를 부르고 다녔다. 이즈음 요석궁에 머물던 과부공주 아유다가 원효를 흠모하고 있었다. 원효의 노래를 간파했던 문무왕은 사자로 하여금 문천교를 건너는 원효를 요석궁에 이끌게 했다. 요석궁의 원효가 아유다와 인연을 맺은 열 달 뒤에 설총이 태어났다.

요석궁을 나온 그는 더 이상 계율에 구애를 받지 않았다. 원효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가 쓴 큰 탈바가지의 모습을 따라 불구(佛具)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화엄경’의 ‘일체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섰다’는 구절을 따서 ‘거리낌 없는’(無碍) 도구라고 하였다. 아울러 삼보(三寶)의 이름(南無之稱)으로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포시켰다. 주변에 몰려든 가난뱅이와 코흘리개들에게는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만 지극히 외우면 성불한다고 가르쳤다. 서라벌을 넘어 신라 곳곳에 불교가 널리 퍼져나갔다.



'금강삼매경론' 등 180여권 저술
원효는 대중교화 틈틈이 87종 180여권의 책을 썼다. 그의 대표작인 ‘열반경종요’, ‘법화경종요’, ‘해심밀경종요’, ‘대승기신론별기’와 ‘대승기신론소’, ‘이장의’,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 등은 경율론 삼장에 대한 주석과 창작이었다. 이즈음 황후의 머리에 악성 종양이 났다. 하지만 전국의 의사와 무당들도 고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황제는 사신을 바다 건너 당나라로 보내어 명약을 구하게 했다. 풍랑을 만나 용궁에 들어간 사신은 용왕에게서 착간(錯簡, 책장이나 편, 장 따위의 차례가 잘못됨)된 ’금강삼매경‘을 건네받았다. 용왕은 대안화상에게 이 경전의 편집을 맡기고, 원효대사에게 주석과 강론을 하게 했다.

신라 황실로 돌아온 사신은 이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결국 대안은 저자거리에서 그 편집을 마쳤고, 원효는 주석 다섯 권을 지었다. 그런데 밤사이 누군가가 그의 주석을 훔쳐갔다. 원효는 사흘의 일정을 확보한 뒤 소의 두 뿔 사이에다 경상을 놓고 소를 타고 황룡사로 나아가면서 주석을 마무리했다. 황룡사 큰 법당에는 황제의 내외와 만조백관 및 수백의 고승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법상에 오른 원효는 주위를 둘러본 뒤 사자후를 토했다. “지난 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비록 (내가) 참예하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르는 곳에서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구나.” 백일 동안 백고좌법회를 주관했던 고승들은 원효를 사람됨이 싫다고 부르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경전의 주석과 강론의 적임자로 원효를 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한때나마 원효를 ‘왕따’시켰던 그들은 부끄러워 그의 법상 아래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원효는 자기 분야에서 ‘백 개의 서까래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하나의 대들보’가 돼야 함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것은 실력은 ‘어디서’가 아니라 ‘어떻게’에 달려있음을 일깨워준 몸짓이었다. 이 경전의 연기설화는 ‘송고승전-원효전’에 자세히 실려 있다.

원효는 빼어난 지견으로 금강삼매의 정수를 전하였고 활발한 언어와 비유로 불법의 요체를 쏟아냈다. 인도에서 건너온 번경삼장들은 이 강론을 담은 주석 ‘금강삼매경소’를 보고 보살이 지었다며 ‘금강삼매경론’이라고 일컬었다. 어느 날 원효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가득한 분황사 서실에서 ‘화엄경’ 제4의 ‘십회향품’을 주석하고 있었다. 순간 그는 보살의 회향은 골방에서 이뤄질 수 없다는 사회적 깨달음을 얻고 붓을 꺾은 뒤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론 통합으로 불교의 대중화 꾀해
두 차례의 깨달음 이후 원효의 삶은 ‘치밀한 사고력’(一心), ‘활달한 문장력’(和會), ‘넘치는 인간미’(無碍)의 기호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중생들을 풍요롭고 이익되게 하고자’ 했다. 여기서 일심은 우주적 마음이자 중생의 마음이다. 동시에 모든 것의 근거이자 한 마음이며 넉넉한 마음이자 따뜻한 마음이다.
 
원효는 중국으로부터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삼론과 유가, 법화와 화엄, 계율과 정토 등 여러 불교 이론들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당시의 제설들은 그 나름대로 일리를 지니고 있어서 하나의 관점으로만 규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설을 통합하기 위해 화쟁(和諍)의 유형을 범주화하고 회통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화쟁은 화쟁 회통의 논리에서 앞의 반이다. 때문에 회통이 함께 언급되어야 한다. 화쟁에서 ‘화’는 ‘회통’(會通), ‘화합’(和合), ‘화회’(和會), ‘화통’(和通)의 뜻이다. ‘쟁’은 ‘주장’의 뜻이다. ‘이쟁’(異諍)은 다양한 주장을 일컫는다. 즉, 화쟁은 다양한 주장을 조화시키는 것이며, 모든 대립과 갈등을 회통시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이론과 논리의 갈등과 대립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을 일컫는다. 회통에서 ‘회’는 뜻이 서로 같은 것에 맞추는 것이다. ‘통’은 글이 서로 다른 것을 통하는 것이다. 즉, 회통은 글이 서로 다른 것을 통해서 뜻이 서로 같은 것에 맞추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애는 화쟁 회통을 통해 전개와 통합의 ‘자재’와 수립과 타파의 ‘무애’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생에 대한 걸림 없는 교화를 펼쳐내는 것이다. 원효의 일심-화회-무애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치밀한 사고력’과 ‘활달한 문장력’과 ‘넘치는 인간미’이다. 그의 역정은 석존이 보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우리는 그를 ‘우리나라의 석존’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국사상사의 ‘새벽’을 열었던 그의 ‘일심’ 철학의 궁극적 지향은 모든 생명체에 대한 우주적 신뢰와 존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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