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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⑨ 열정적 교육으로 맑은 사회를 꿈꾸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그는 조선 지성사에서 백미로 자리매김 될 수 있는 인물이다. 그 어렵다고 하는 과거 시험에서 아홉 번이나 수석 합격을 했다는 이른 바 ‘구도장원(九度壯元)’을 이뤘다. 시험은 논외로 하더라도 퇴계 이황, 고봉 기대승, 우계 성혼 등 당대의 기라성 같은 지성들과의 철학적 논변, 조정에서 보여 준 우국충정, 만년에 심혈을 기울인 교육 활동, 평생 학문에 뜻을 두고 고심한 저술 활동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삶의 열정에 가득 찬 그의 생애는, 이 시대에 삶을 디자인하는 모든 사람들의 본보기로 충분하다.

시대정신 맞춘 개혁 내세워 왕에게 직언
‘학교모범’, ‘격몽요결’ 등 교육학 이론 갖춰





3세부터 성숙한 시작(詩作) 능력 보여

강원도 강릉 오죽헌(烏竹軒). 까만 대나무가 둘러싸인 집 안 뜰에서, 이제 갓 일어나 걸음걸이를 하고 말을 시작하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빨간 석류를 까서 들었다. “이것이 무엇처럼 보이느냐?” 아이는 눈을 껌벅이며 말한다. “석류 껍질이 부서진 붉은 구슬을 싸고 있네.” 말하기도 버거운 세 살짜리 어린 율곡이 시적으로 사물을 표현한 대답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무대는 바뀌어, 경기도 파주 임진강 기슭. 화석정이란 정자가 있다. 정자에 오르면 눈앞에는 임진강이 흐르고 맞은편에는 넓은 들판, 뒤편에는 나지막한 산이 반갑게 맞이한다. 여덟 살 무렵의 율곡이 가을 날 화석정에 올랐다. 그리고 한편의 시를 읊조린다. “숲속 정자에 가을이 깊었으니/시인의 생각 끝이 없네/저 멀리 흐르는 강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서리 맞은 단풍은 해를 따라 붉어가네/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 내고/강은 만 리의 바람을 머금었네/하늘을 가로지르는 저 기러기 어디로 가는 걸까/저무는 구름 속으로 울음소리 끊기누나.” 소년 율곡의 시작 능력은 경이롭다. 그것은 그의 비범한 천재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10세가 되어서는 너무나 성숙한 정신 경지로 나아간다.

강릉 경포대. 10세의 율곡은 경포대에서 한편의 글을 짓는다. 그것은 ‘경포대부(鏡浦臺賦)’로 남아 있다. “마음을 비워 사물에 응하고 일을 마주했을 때 마땅하게 하면 정신이 이지러지지 않아 안이 지켜질 것이니, 어찌 뜻이 흔들려 밖으로 나가겠는가. (중략) 선비가 한 세상 태어나 자신만의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다가, 혹 풍운의 기회를 만나더라도 마땅히 조정을 돕는 신하가 되어야 하리라. (중략) 삶이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짧은 백년이고 넓은 바다의 한 알 좁쌀이로세” 이것이 과연 10세의 율곡이 지은 글이란 말인가? 마치 생을 달관한 노인처럼, 그의 글에는 이미 세상을 향한, 삶의 희노애락을 예비하고 있는 듯하다.




약관(弱冠)에 삶의 뜻을 세우다
그런 천재에게 인생 최대의 전환점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사임당신씨의 별세였다. 율곡은 아버지를 따라 외지에 있다가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그에게 무엇보다도 가슴 쓰라린 한으로 남았다. 그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다. 3년간 시묘살이를 마친 율곡은 금강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인생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때 율곡이 불교에 심취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궁극적 귀의처는 유교였다.

 금강산에서 하산한 율곡은 강릉의 외가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외할머니와 이모가 있었다. 여기에서 율곡은 자신의 삶의 방향을 철저하게 유교에 근거해 구체적으로 설계했다. 그것이 유명한 스스로 경계하며 삶을 다짐한 글 ‘자경문(自警文)’이다.

“우선 뜻을 크게 하여 성현을 공부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조금이라도 성현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삶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중략) 공부는 느리게 혹은 급하게 해서는 안 된다. 평생을 통해 해야 하니, 죽은 후에나 그만둘 뿐이다.”
 
 20세의 청년 율곡의 다짐은 간단하지만 무섭다. 그가 스스로 다짐한 제일의 요청은 삶의 뜻을 세우는 일,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한 학문적 선언이었다. 그것은 나중에 그의 주요 저술인 ‘격몽요결’, ‘학교모범’, ‘성학집요’ 등에서 일관되게 강조된다.

당시로서는 약간 늦은 22세에 결혼을 한 후, 20대의 청년 율곡은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송강 정철 등과 교유하며 지식인 사회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를 여읜지 10년째 되던 해,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다시 삼년상을 치렀다. 똑똑한 친구들은 모두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갔는데, 율곡은 삼년이라는 기간이 또 늦추어 졌다. 20대의 마지막 해, 29세가 되어서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하였다. 정말 위인의 삶은 대기만성(大器晩成)인가 보다.

불의한 공직사회에 홀로 도전하다
관직에 나아간 율곡은 자신만만한 30대 소장파였다. 그의 정의감은 공직 사회의 행태를 보면서 하나씩 폭발하기 시작한다. 율곡의 눈에 그들은 이렇게 보였다. “중앙의 정부 각 부처에 있는 고급 관료들은 분명하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지 못하고 대충 어물어물하기 일쑤다. 하급 관리들은 맡은 일을 열심히 하기보다는 무언가 교활하게 꾸며 적당하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건성으로 넘어가는 버릇에 젖어 있다. 

지방에서는 수령들이 문제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던 이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문제 있는 것도 말하지 않고 조용하게 지나가는 것을 옳다고 여긴다. 올바른 생각을 가진 참모가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건의하면, ‘괜히 일을 만든다’고 핀잔이나 주고, 백성들을 위해 특별히 뜻을 세워 일하려고 하면, ‘참 어리석은 녀석, 혹은 혼자 잘난 체하는 이상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이런 모습을 수시로 보고 있자니, 정의와 사명감에 불타는 신참 관료인 율곡,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으랴!
보다 못한 율곡은 수시로 공직 사회의 개혁 방안을 제시한다. 첫째, 지도자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따라서 왕은 마음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근본을 세워야 한다. 둘째,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여 정부를 맑게 해야 한다. 셋째,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하게 해야 한다.

율곡의 공직 사회 정화를 비롯한 사회 개혁의 요지는 39세 때 선조에게 올린 “만언봉사”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그것은 시대에 맞는 제도 개혁(變法)과 삶의 알맹이(實)를 회복하는 일, 그리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방도가 핵심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세금의 경우, 잘 살지 못하는 아래 사람의 것을 덜어서 잘 살고 있는 위 사람에게 보태주던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다. 율곡이 볼 때, 이는 시대정신에 맞지 않았다. 인재를 등용할 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합리적인 기준에 의해 등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사청탁에 의존하고 있으니, 올바른 인재가 발탁되기 만무하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믿어야 하는 데 믿음의 알맹이가 없고, 관리들은 일을 제대로 맡아하는 알맹이가 없으며, 정책은 백성을 잘 살게 만드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런 알맹이가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장래는 어디에 기댈 것인가? 율곡의 고민은 점점 깊어지고, 그것은 다양한 사회 정치적 개혁의 목소리로 연결되었으나, 제대로 귀 기울이는 관료는 드물었다. 이런 공직 사회의 부정부패에 대해, 우리에게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이지함은 “율곡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망하지는 않을텐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진실’(誠)을 핵심으로 한 교육에 앞장
율곡은 나이 40이 되면서 본격적인 저술 활동에 몰입한다. 율곡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성학집요(聖學輯要)’는 당시 24세의 청년 왕이던 선조를 위한 것으로 지도자의 공부 내용을 담고 있다. 왕이 마음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근본을 세울 수 있도록, 지도자 교육에의 간절한 희망을 담은 것이다. 자기 수양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길에 이르기까지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의 말씀을 담아 왕에게 올렸다.

그 교육의 핵심은 진실함(혹은 성실함, 정성스러움; 誠)에 있다. 배우는 자는 반드시 성심(誠心)으로 자신의 길을 예비하고 세속의 잡된 일로써 자기의 뜻을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 ‘성(誠)’은 글자 자체에서도 ‘말을 이룬다(言+成)’라는 의미가 배어 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참이요 거짓이 없는 것, 나를 속이지 않는 동시에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실로 자신에 대하여 충실한 동시에 남에 대하여 정성을 다할 것을 요청한다. 즉, 성(誠)의 교육은 자기 충실과 타자 배려의 교육 상황을 연출한다.

성실은 성현들의 기본적인 삶의 자세이다. 율곡이 20세에 고심 끝에 내린, ‘뜻을 세우자(立志)’는 말은 ‘반드시 성현이 될 것을 기약’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옛날 성실하게 삶을 영위했던 성현의 위업을 깊이 깨닫고 그 업적이 계속 이어지도록 노력하는 삶의 실천, 그것이 그의 학자적 양심이었고, 교육자로서의 소망이었다. 은퇴를 결심하고 해주의 석담에서 본격적으로 교육활동을 하려던 율곡은 이런 그의 교육적 열망을 ‘격몽요결’과 ‘학교모범’에 담아냈다. 그 유명한 해주향약, 청계당과 은병정사에서의 활동은 바로 이때의 교육 실천이다.

이처럼 율곡은 학자로서 “뜻을 세우자”라는 선언을 통해, 사람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율곡은 정치가이자 관료로서 사회의 부정의에 대항하여 맑은 사회를 부르짖었고, 교육자로서 지역사회 교육과 제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는 어떤 뜻을 세우고 있는지, 겨레의 스승이 제시한 입지(立志)를 성찰한 적은 있는지, 사회 개혁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지 그의 삶에 비춰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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