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집애는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다. 안 그래도 살에 뒤덮여 답답한 눈에 눈동자가 유난히 작아 희번덕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황순구는 일단 계집애 뺨부터 한 대 때린다. 손바닥이 울리고 덩달아 사타구니에까지 자르르 통증이 전해진다.”(15쪽)
안보윤의 장편 ‘사소한 문제들’(문학동네)의 첫 장면은 놀이터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놀이터를 장악하고 있는 건 학교에 가지 않는 학생들이다. 그들의 놀이란 고등학생 남자아이들이 중학생 남자아이 황순구를 괴롭히는 일이다. 황순구에게 여중생을 겁탈하라고 명령하고 그 모습을 낄낄대며 지켜보는 그들에겐 폭력으로 서열화된 명령과 복종이 있을 뿐이다.
작년 10월 이 소설이 나왔을 때, 반응은 냉담했다. “내용이 너무 폭력적이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삼은 건 너무하다”는 것이었다. 초등학생은 너무 심하다고? 우리가 외면한 현실은 그러나 이보다 더 심했다. ‘대전 여고생 자살’, ‘대구 중학생 자살’ 학교폭력에 의한 어린 학생들의 연이은 자살소식과 함께 드러난 실상은 ‘소설’ 그 이상이었다.
작가가 ‘사소한 문제들’의 집필을 시작하던 2008년엔 초등학교 여학생을 중학생들이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해 사회가 떠들썩하던 때였다. 우리는 잊어버렸지만, 그 여학생은 지금도 여전히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계집애는 뚱뚱한데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짧은 팔다리를 가져 ‘슈렉’이라고 불리는 초등 5학년 여자아이 아영이다. 황순구는 자신이 당해왔던 폭력을 고스란히 아영에게 되풀이한다. 황순구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아영은 동네 헌책방으로 숨어든다.
“여자아이에게선 어쩐지 동류의 냄새가 났다. 동류, 라는 것에 대해 두식은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그것이 아주 연약하고 비굴한 이름이라는 것만은 알고 있다. 말하자면 두식에게 있어 여자아이의 존재는 저기서 시비 걸 듯 핏대를 세우고 있는 남자아이만큼이나 거북한 것이다.”(43쪽)
서른아홉 살 동성애자인 헌책방 주인 두식은 그런 아영에게서 동류(同類) 의식을 느끼며 세상에 대해 닫아두었던 빗장을 풀기 시작한다. 하지만 소설은 아영이 황순구에게 성폭행 을 당한 장소인 PC방 화장실에 불을 지르다가 다리에 화상을 입는 장면에서 또 다시 잔혹극으로 치닫는다. 아영의 내부에서 자라난 폭력. ‘나는 되게 못났고, 따돌림을 당할 만큼 못된 아이인가 보다’라는 생각이야말로 한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한 더 무서운 폭력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피해자가 때로는 가해자로 돌변하는 현실. 그렇게 습득되고 대물림되며 폭력은 점점 진화한다. 여기에 가세해 어른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무분별하게 폭력적 콘텐츠와 유해환경을 양산해낸다. 매번 반복되는 대안 없는 분노와 슬픔. 이러한 반복의 순환에서 우리는 폭력에 점점 더 무감각해져 왔다.
치료를 받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아영을 바라보며 두식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제부터 아주 먼 길을 이 낡은 몸으로 걸어내야 한다. 꾸준히 걸어낸다면 그간 놓쳤던 행복의 퍼즐 하나쯤은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245쪽)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어떠한 폭력에서도 자신을 소중히 하는 마음마저 놓아버리면 안 된다”고 작가는 조언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행복하지 않다. 사소하지 않은 문제들을 사소하게 봐 남겨왔기에 키워 온 문제들. 3개월 전 공감하기 어렵다던 그 소설에 우리가 지금 매우 공감하고 있는 것은 이 소설이 현실의 잔영을 넘어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대전 여고생’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두 개의 버튼을 눌렀다. 하나는 집으로 가는 4층이었고, 다른 하나는 죽음에 이르는 14층이었다. 4층에서 문이 열렸지만 학생은 그곳에서 내리지 않았다. 그 엘리베이터 안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간 친구를 지키지 못해 따라간 아이까지….
이번엔 달랐으면 한다. 아직(?) 우리의 분노는 유효하다. 이번에도 학교폭력이 또다시 ‘사소한 문제’로 인식된다면, 더 많은 아이들이 4층이 아닌 14층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 아직 무수히 많은 아영과 두식이 존재한다는 사소하지 않은, 아니 사소할 수 없는 현실을 제발 이번엔 잊어버리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