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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은상> 35년 성장한 시 나무




초임 시절
이제 교단에 선지도 35년째다. 내가 걸어온 길을 머릿속으로나마 한번 돌아보고 싶어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과연 교사로서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을 안은 채 1977년 3월 발령을 받고 교사가 됐다. 배우는 입장에서 가르치는 입장으로의 전환이 어색했다. 해가 밝아오는 아침이 싫어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출근 시간에 몰려 몸을 힘겹게 일으키고 출근하기를 한 달. 나도 모르게 가르치는 일에 재미가 솔솔 나면서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어릴 적 자연에서 뒹굴던 나였기에 어느새 칠판 우측에 윤동주의 서시를 써 놓고 있었다. 학생들에게 낭송해주며 말했다. “선생님이 이 시에서 좋아하는 부분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란다. 생명은 그만큼 다 중요하지. 풀 한 포기든 작은 벌레 한 마리든 말이야.” 시를 통해 아이들에게 생명존중의 정신을 심어주고 싶었다.

교사 초기에는 훌륭한 교사를 목표로 세우고 교육도서를 읽고 각 과목별 특징을 살린 수업모형을 알려고 노력하면서 나름대로의 모형을 정리해 학생들의 사고력을 향상시키는데 주력했다. 학생들의 사고를 건드려주기 위해 발문에 유의해 공통점, 차이점을 찾고 비교하며 분석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해보게 했다. 그러다 보니 늘 허용적인 학급 분위기가 돼 소란을 묵인하게 되기도 했다.

고학년을 가르치면 과학 실험을 할 때 탐구과정에 맞춰 실험을 하게 하고 사고력을 키워주며 흥미를 느끼도록 동기유발에 신경을 쓰곤 했다. 교사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다정다감한 교사가 되려고 일기를 통해 꼼꼼히 리플을 달아주기도 했다. 일기를 형식적으로 쓰는 아이도 있지만 진솔하게 하루를 담은 아이들도 많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서울 장지동에 살면서 콩밭에서 콩을 따고 모아서 집으로 가져오는 일을 쓴 아이의 일기가 신선했고, 어머니가 미장원을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학생은 귤 하나를 까면 방안 전체가 귤 향기로 가득하다는 내용을 써 절제된 풍요를 느끼게 했다.

시를 쓰자
시간이 흐르면서 선생님 노릇을 잘하려면 한도 끝도 없이 할 일이 많고, 쉽게 생각하면 설렁설렁 넘어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전자를 택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내가 만들어서 일을 벌였다. 그때쯤 훌륭한 선생님보다는 좋은 선생님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인 이오덕의 글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가난한 학생이 도둑으로 몰려 아무도 자기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자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였는데 그 아이에게 글로나마 표현하게 했다면, 그 아이는 분명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글을 한 줄이라도 쓰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를 감상하기만 했던 나에게 그 글은 가르침을 제시했다. ‘그래, 아이들에게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알려주고 시를 쓰게 하자. 그게 그들에게 창작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일이 될 거야.’ 그 결심 이후 1학년을 맡든 6학년을 맡든 시 쓰기는 계속됐다. 1학년도 방법을 가르쳐주면 곧잘 쓰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꽃밭에 데리고 나가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꽃향기를 맡으며 흙을 만져보게 하고 그 느낌을 시로 표현하게 했다. 운동회, 체험학습을 경험하고 그 일을 시로 쓰게 했더니 조금씩 자기만의 느낌과 언어로 표현했다. 학생들의 감성이 시로 표현되는 것을 보고 그 자료들을 모아 현장연구보고서를 써 보냈는데 1등급을 받아 기쁘고 놀라웠다. 그 이후는 나는 5년간 연구하는 재미에 푹 빠져버렸다.

연구는 한해 교육농사
남자교사나 승진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연구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연구는 나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몰고 왔으며 교사로서 희열을 만끽하게 했다. 연구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하루 5시간 정도 밖에 자지 않고 학생들에게 투입할 학습지를 만들고 연구할 주제에 맞는 도서, 관련된 선행논문 탐독 및 논문 차별화 연구를 했다. 어느 날은 학교에서 일하다 보니 밤 12시가 돼 무서워 택시를 탈 수도 없고 50분 정도 되는 길을 걸어 집으로 왔던 일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대중가요는 생명력이 길지 않지만 우리 민족의 노래인 시조는 고려 시대 말부터 지금까지 그 맥을 유지한다는 말을 듣고 5학년 학생에게 시조를 가르치기 위해 시조 생활을 발간하는 모임에 가서 시조공부를 했다. 시 쓰기도 쉽지 않은데 글자 수를 45자 이내로 초장, 중장, 종장에 자기 생각을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먼저 시심을 길러주기 위해 1인 1화분 가꾸기를 실시했다. 반 창틀에는 예쁜 화단이 생겼다. 아이들은 처음엔 마음을 표현하기도 글자 수를 맞추는 것도 힘들어했다. 그러나 감상시조를 감상하고 글감수첩에 글감을 적고, 표현방법을 익히는 작업을 두 달 정도 하고 나니 “이런 마음을 표현하려면 글자 수를 이렇게 해야 한다”고 손가락을 펴 따지기도 했다.
 
한 번은 시조쓰기를 힘들어하는 남학생어머니가 찾아오셔서 “선생님, 시조를 어떻게 쓰나요?” 하시기에 “시조는 어머님이 시장에 가서 콩나물을 보고 우리 가족에게 국 끓여 주어야겠다. 고등어를 보고 무에 조림해주면 온 가족이 맛있게 먹겠는데 이런 마음을 그대로 글자 수를 맞춰 표현하는 것입니다”했더니 잘 알았다고 하셨다. 그 이후 남학생의 시조 쓰는 실력이 늘어 서울교대에서 주최한 시조 쓰기 전국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우리 반 12명이 차상에서 장려상까지 골고루 받는 기록도 세웠다.

봉사조직을 지도했던 것도 좋았다. 5학년을 대상으로 학교봉사활동과 지역봉사활동으로 나눠 월․수․금은 학교활동으로 다른 학생보다 20분 정도 빨리 와서 학교 층계, 창틀 닦기, 껌 자국 제거, 꽃밭에 물주기, 분리수거장 청소, 특수학급 보조 등을 해서 학교가 반짝반짝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유치부보조를 맡은 아이는 방학 때 그들이 체험학습 갈 때 따라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 일기를 썼다. 방학에도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아이들의 봉사정신이 싹트고 있구나 하며 흐뭇했다.

동네봉사활동은 놀이터 쓰레기 줍기, 자기 집 골목 깨끗이 하기, 독거노인 위문하기, 후배 가르치기 등을 했다. 처음엔 아이들이 쓰레기 줍기가 낯설고 창피하다며 8시 넘어 밤에 한다고 해서 “너희들이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2가지 점에서 훌륭한 일이다. 한 가지는 너희의 모습을 보고 버리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심어주고, 또 한 가지는 거리를 깨끗이 해 동네가 아름다워지는데 기여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더니 점점 참여율이 높아졌다. 독거노인 집에 가서 청소를 해주며 음식을 함께 먹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 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어 전화를 드렸다고 했다.

봉사활동도 어려서 해야 그 싹이 트고 성장해 풍요로움을 함께 나누는 사회가 될 것이라 여겨 했던 것인데 그 동기는 사소한 것이었다. 눈이 많이 내린 해가 있었는데 자기 집 앞 눈 치우기를 하지 않아서 노인들이 빙판이 된 길에서 넘어지고 자동차 사고가 잇따른 것을 봤다. 함께 하면 해결이 빠르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학급에서 급식할 때 무거운 식판 나르기를 서로 꺼려 언제나 힘없는 아이 차지가 되고 힘이 센 아이가 기피하는 것을 보고 남을 배려하는 봉사정신을 심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 봉사활동의 시작이 됐다.

어느 해 카드 대란이 일어나 가족동반자살이 이어지고 은행 강도가 발생했다. 제자 한 명이 엄마와 함께 10층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보고 어려서부터 소비욕구를 조절하는 힘을 길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바른 금융습관화 방안을 주제로 연구한 결과를 토대로 ‘저축-소비-투자-기부’ 네 칸을 구별해 우유통으로 저금통을 제작해서 집안에 배치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용돈을 4분야로 나눠 쓰고 저축-소비-투자-기부 칸에 모인 돈을 들고 한 달에 한 번 은행에 가도록 했다. 가정과 연계해서 어머니들에게는 가계부를 아버지는 차계부를 쓰게 해 매달 뽑아서 상을 주며 격려했다.

아이들은 수입-지출을 용돈기입장내역을 만들어 쓰게 했는데 특별한 점은 투자와 기부였다. 투자는 갖고 싶은 물건이 있을 때 계속 투자 란에 돈을 모아 목표한 돈이 모아졌을 때 사게 했다. 어떤 여학생은 20만 원짜리 핸드폰을 사기 위해 3년을 모았는데 정작 그 돈이 모아지니까 기뻐서 헌 것을 물려받고 돈을 통장에 넣어두었다고 했다.

기부는 연말에만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매달 용돈의 10%를 떼어 놓고 모았다가 도울 일이 생기면 적은 돈이지만 자기 힘으로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기쁨을 주어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의도였다. 일부 아이들과 학부모는 뚝섬에서 열리는 아름다운 가게에 가서 가게 이름도 붙이고 물건을 팔아 벌어들인 소득 전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한 학급이 기획한 일들이 학생들의 생각을 깨우치고 그 아이들이 부모를 깨우치기도 한 일련의 활동들을 모아 논문을 써서 교총에 냈더니 전국대회 재량활동분야에서 1등을 해 나에게는 한없는 기쁨을 안겨주기도 했다. 수많은 일 중에 가르치는 일을 맡게 된 것은 행운이었고, 학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부모를 움직인 일들은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22년 후의 만찬
지난해 22년 전 제자들과 만찬을 하게 됐다. 소녀처럼 떨리고 설레었다. 그들은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6학년이었던 제자들인데 그 중에 한 명이 3일간 인터넷을 뒤져 나의 흔적을 찾아 연락이 닿았다. 연락해온 학생은 의젓하게 직원 150명을 이끄는 CEO로 성장해 있었다. 과학을 좋아했던 제자는 서울공대를 나와 교수를 꿈꾸고, 몸이 약했지만 그림을 잘 그리던 제자는 홍대를 나와 미술대 교수가 되었다. 체육을 좋아하던 제자는 늦게 공부바람이 불어 독일에서 박사학위에 도전하고 있었으며, 마음이 너그럽고 예뻤던 제자는 공무원이 되는 등 취업하기 힘든 시대에 도 모두가 취직해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은 나를 권위적이지 않고 친절하고 따뜻하게 해주신 선생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자기들이 있게 하는데 밑거름이 돼 꼭 한 번이라도 뵙고 싶었다고 했다. 혹시 세월이 너무 흘러 선생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는데 만나 뵈니 그때 그 모습 그대로여서 놀랐다고 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웃으면서 가르치신 덕이라는 말에 얼마나 흥이 났는지 만찬 이후 만나는 동료들에게 그 제자들 이야기를 입이 닳도록 자랑하며 행복했다. 헤어진 이후에는 중국에서 생활하는 제자와 메일로 가끔 생활을 전해주고 있다.

학원에서 배울 수 없는 시심의 샘물을 마시게 하고 시의 샘터를 마련해준 것이 그들이 살아가야하는 삶에 시들지 않는 오아시스를 찾게 해주었다고 나는 믿기에 무한히 기쁘고 행복하다. 어린 제자가 성장해 옛 스승과 소통하기 위해 연락을 했다는 것은 내 교육방식이 일방통행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줬다. 나는 오늘도 그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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