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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교단수기 공모 금상> 두레박

아이들을 사랑으로 골고루 감싸주는 진정한 교육자가 되겠노라 다부진 마음으로 디딘 교직생활 30여 년. 그동안 나와 인연 맺어졌던 수많은 학생들을 나는 과연 사랑으로만 감싸줬을까? 돌이켜 생각하면 시행착오로 얼굴 붉어질 일이 더 많았다. 항상 아이들을 공경으로 섬기자는 마음 끝에 나풀거리는 단발머리 하나가 걸어 나온다.

3월은 새 아이들을 만날 수 있는 설렘의 달이다. 생활기록부를 한 장 한 장 넘기다가 학부모 란에 사선이 그어져 있는 쪽에 눈이 머물렀다. 보호자는 외조모, 5학년 2학기에 전학 왔으며 교과학습 발달사항에 양, 가가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행동이 느리고 실천력이 부족하며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우울한 편이라는 아이, 영은이와 첫 만남이었다. 영은이의 부모는 생존해있었다. 생모는 영은이가 여섯 살 되던 해 남편과 헤어진 후 영은이는 친정에 보내고 언니만 데리고 재혼했다가 외할머니가 작고하자 할 수 없이 데려왔다고 했다.

단정치 못한 용모에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전학 온 후 줄곧 따돌림을 받아왔던 아이는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고 매사에 신경질적이며 공격적이었다. 한 학기에 걸쳐 반 아이들과 나는 영은이를 공경으로 대했다. 기초 실력을 올리기 위해 개별 학습이 이뤄지고 함께 어울리기 위해 또래 도우미들이 나섰다. 진심 어린 보살핌으로 차츰 여느 아이들처럼 무리 속으로 들어왔다. 한시름 놓으며 그해 여름방학을 맞았다. 하지만 방학 끝 무렵, 반장 어머니의 다급한 전화가 날아들었다. “선생님, 영은이가 가출했답니다. 며칠째 시장 바닥에 돌아다니는 걸 국수가게 할머니가 데리고 있다고 알려왔습니다.”

아이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새로운 가정에서 잘 적응하는 줄 알았다. 생모가 재혼한 남편과도 헤어지고 자매에게 방 한 칸만 얻어준 채 아들만 데리고 잠적해버린 것이었다. 한 살 터울인 언니가 툭하면 때리고, 잘못도 없이 제 앞에서 무릎 꿇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에 달군 젓가락으로 다리를 지졌으며 대항하면 부엌칼로 위협한 것이 가출 이유라고 했다. 아이는 굶주림으로 시장을 헤매다가 인정 많은 그 할머니 눈에 띄었던 것이다. 연락을 받고 갔을 때는 아이가 이미 도망가버린 후였다.

여러 날 수소문 끝에 작년까지 살았던 W읍에서 영은이를 찾았다. 산발한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고, 모기에 물린 얼굴은 벌집 같았다. 반바지 밑의 다리와 신발도 못 신은 맨발에는 여기저기 긁힌 생채기투성이였다. 버려진 아이 모습이었다.


집으로 데려가려는 나의 설득을 아이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몸도 마음도 무거웠지만, 아이의 연고자를 알아내기 위해 마을을 샅샅이 다녔다. 동네 소식마당인 미장원에서 영은이 외숙모의 연락처를 겨우 알아냈다. 오랜 설득 끝에 아이의 손을 잡고 어둠이 쌓이는 마을을 빠져나왔다. 지척의 바다에서 파도는 상처 입은 짐승처럼 몸을 뒤채며 울고 있었다.

딱한 사정을 외숙모에게 소상히 전하며 아이를 맡아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외숙모는 손사래를 치며 영은이 삼촌의 소재를 일러줬다. 가게로 들어서니 젊은 여자가 뾰족한 턱을 높이 들고 있었다. 첫마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새된 목소리가 날아왔다. 절대로 아이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절박한 심정으로 아이의 친아버지 거처를 알려달라고 하니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라고 했다. 그럼 할머니라도 뵙고 이야기하겠다며 이층 살림집으로 밀치고 올라갔다. 한쪽에서 버림받은 짐짝처럼 서 있는 아이의 모습은 나에게 절박함과 용기를 주었다.

병색이 완연한 할머니는 흐느끼면서 아이를 보듬고 놓을 줄 몰랐다. 그 사이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협하듯이 팔짱을 끼고 왔다가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 버렸다. “선생님, 우리 며늘아기 봤지예? 이 얘를 이 집에 들였다간 아픈 저까지 쫓겨 납니더. 차라리 고아원에 맡기소.”

들어서는 안 될 그 말을 들은 아이가 뛰쳐나갈까 봐 손을 꽉 잡았다. 나마저 몰라라 한다면 아이는 다시 시장바닥을 배회하거나 W읍의 외가를 서성이며 동네 구걸이나 할 것임이 뻔했다. 보호자를 찾을 때까지 우리 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다.

새로 산 가방과 옷가지를 받고 빙긋이 웃는 영은이는 우리 집에서 가정의 온기를 받기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생기가 돌았고 밝아졌다. “선생님, 이렇게 선생님 집에서 함께 사니까 정말 좋아요. 선생님 딸로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선생님과 계속 함께 살면 안 돼요?” 간절하게 말하는 아이의 눈빛이 애처로웠으나 언제까지 함께 살 수 없었다. 생모의 행방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생모가 다방에서 일한다는 소문을 듣고 수소문하고 다녔으나 막연했다.

할 수 없이 중학교로 영은이 언니를 찾아갔다. 한눈에 아이의 눈빛이 몹시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간곡히 말했다. 영은이 가출 후 새로 이사한 집으로 갔다. 어두침침한 방은 혼자 눕기에도 비좁은데 그마저도 나뒹구는 지저분한 이불과 수북이 쌓인 부탄가스 빈 병들로 꽉 차있었다. 가스 냄새와 눌어붙은 찬 찌꺼기 냄새가 뒤범벅된 방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없었다. 아이와 함께 말끔히 치우고 영은이를 데리러 우리 집으로 향했다. 언니를 본 영은이는 절규하며 결사적으로 버텼다.

“흥! 또 때리고 젓가락으로 지지려고? 선생님, 언니에게 가느니 죽는 게 낫겠어요. 엄마도, 언니도 다 싫어요! 차라리 고아원으로 보내주세요!” 아이는 언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울부짖었다. 행복한 가정이 미리 누리는 천국이라면 지금 영은이 앞의 현실은 무어라고 해야 할까? 가정은 춥고 어두운 밤길에서 멀리 보이는 불빛처럼 따뜻함의 표상이기도 하지만 자매가 겪는 현실처럼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몇 날 며칠의 설득 끝에 드디어 영은이는 언니 집으로 들어갔다. 언니에 대한 여전한 공포심으로 사흘간은 마당 한켠에서 새우잠을 자거나 주인집 마루 구석에서 몰래 잤다고 했다. 나는 학교에서는 부진 과목 지도를, 퇴근 후면 곧장 자매 집으로 가서 엄마 역할을 했다. 아이들의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어갈 무렵 드디어 생모와 통화가 이루어졌으나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출소한 생부가 딸들을 찾는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아이들이 만나길 원치 않아 모른 척했다.

어느덧 졸업이 다가왔다. 그날 영은이 엄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도 찾아오는 이 없는 영은이의 쓸쓸한 졸업을 축하해주려는 듯 눈이 내렸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라는 말을 떠올리며 영은이의 어깨를 감쌌다.

중학교에 진학한 영은이는 하키선수로 맹활약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선생님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언니의 편지도 함께 들어 있었다. 오랜 교직 생활 동안 여러 아이들을 만났다. 마른버짐 가득한 얼굴로 점심시간이면 생라면을 먹던 아이, 버림받아 할머니 같은 엄마에게 입양돼 가출을 일삼던 아이, 가정폭력에 시달려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려 있던 쌍둥이 자매…. 그들에게 부는 비바람을 막아주고자 애쓰며 스승의 역할이 무엇인지 늘 고민했다.

나는 섬세해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존재인 아이들의 상처는 보듬어주고 격려와 온정을 쏟아 그들의 보석 같은 잠재력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이고 싶다. 그들이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정성껏 두레박질하는 것이 교사인 나의 소임이라고 생각할 때면 가슴이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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