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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교단수기 공모 은상> 가슴으로 품어 부화시킨 병아리 한 마리

“안됩니다! 안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당장 데리고 가이소!”

그날도 예외 없이 낯선 전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교무실에 나타났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아 화를 참지 못하고 학부모를 향해 소리쳤다. 재직 중인 학교가 도시에 인접한 시골학교이다 보니 도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한 학생이나 문제 학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학교로 전학 오겠다며 교무실을 찾아왔다. 그렇게 전학 온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학교를 뒤흔들어 놓은 뒤 중도에 그만두거나 또 다른 학교로 옮겨가는 일들이 반복되곤 했었다.

그런 아이들을 맡게 된 학급 담임과 교과담임들은 모든 학생들에게 골고루 쏟아야 할 정성을 오로지 전학 온 학생에게 쏟느라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의 볼멘소리도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동안 학적 업무를 담당한 죄(?)로 자의반 타의반 문제 학생들을 많이 맡아 왔던 터라 민감해진 상태였는데 새로이 전입을 의뢰하고자 온 그 학생과 학부모를 보자 순간적으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내뱉은 일성이었다.

갑작스런 큰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진 학부모는 당황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교무실 입구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순간 교무실 분위기는 냉랭하게 변해버렸고,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얼마 후 교감 선생님이 얘기나 들어보자며 학부모를 자기 곁으로 오라고 해 자초지종을 들었다.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던 중, 곁에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흘려 들어보니 학부모의 사정이 너무도 딱했다.




대화 내용의 핵심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어린 삼남매를 키우기 위해 난전에서 과일을 팔아 생계를 근근이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내 녀석이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해 결석을 밥 먹듯 하고 싸움질, 도둑질 등의 행위를 반복적으로 해 결국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며 인근 학교를 돌아다니며 호소했지만 어느 학교도 받아주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없이 살아도 아비 없는 자식이란 소리 듣지 않게 하고, 커서 제 밥벌이라도 하며 살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단다. 그래서 무턱대고 교육청을 찾아가 자신의 딱한 사정을 호소했더니 우리 학교로 가보라는 얘기를 해주기에, 그 말만 듣고 찾아왔는데 문전박대를 당하게 되는 것 같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순간 죽고 싶은 생각 밖에 들지 않더라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사정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내 생각만 하면서 소리친 비이성적 행위가 후회되면서 얼굴이 화끈 거렸다. 얘기를 다 듣고 난 교감 선생님이 어머니를 휴게실에서 잠시 기다리게 했다. 그리고는 나를 불러 딱한 처지를 설명해주며 전입을 허용해 주면 어떻겠느냐고 설득했다. 나 역시 그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간 학교에서 겪었던 일련의 상황들에 대한 불만을 쏟아 놓으며 어려움을 호소했고, 앞으로는 좀 더 신중하게 해 줄 것을 주장하며 전입 허용에 동의했다.

나는 학부모에게 그렇게 대했던 경위를 설명하며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막내아들 ‘성규(가명)’를 위해 함께 노력하자며 몇 가지를 주문했다. 힘들겠지만 당분간 등하교를 함께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리고 방과 후 일어난 일들에 대해 상세히 알려 줄 것도 당부했다. 아울러 나 또한 학교에서 있었던 일상을 상세히 일러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물론 성규에게서도 다시는 흐트러지지 않고 열심히 학교에 다니기로 굳게굳게 다짐을 받았다. 그렇게 성규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채 3일을 넘기지 못해서 성규는 결석을 하고 말았다. 염려 했던 일이 일어나고야 만 것이다. 화가 나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더니 함께 등교하던 중 도망을 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이를 찾아서 데리고 가겠다 했다. 며칠이 흘렀을까, 성규는 초췌한 모습으로 어머니에게 끌려 다시 학교에 나타났다. 당장 학교 그만두라고 소리치며 단호하게 꾸짖자, 집에서 교육을 시켰는지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손발이 닳도록 빌며 용서를 구하기에 다시 다짐을 받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그 후에도 결석은 물론이고, 수업중 도망가는 행위며 급우들에 대한 폭력, 남의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다니다 사고를 내 경찰서에 불려 다니는 일 등 하루가 멀다고 말썽을 부렸다. 학적을 정리해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학생에게 그러한 일은 사형과 같은 일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미우나 고우나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욕을 먹이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는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는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차마 그런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그냥 지나칠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학교가 아
닌 바깥에서 단 둘이 만나 진심을 보여주면서 가슴 속에 담아둔 솔직한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진실 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 그도 자신의 속내를 잘 털어 낼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어느 날 퇴근길에 성규를 승용차에 태워서 야외로 나갔다. 서너 시간 드라이브도 하고 저녁도 함께 먹으면서 이런 저런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성규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맞장구도 쳐주고, 그의 입장에서 모든 걸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자 성규도 마음을 열고 깊이 감추어 두었던 속내를 드러내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자란 터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먹고 살기 위해 노점상을 하시는 어머니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 까지 밖에서 지내게 되면서 따뜻한 어머니의 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한 채 외롭게 살아가는데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집에 들어가도 늘 혼자였고,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려 오락실이며 학생들이 가서는 안 될 곳으로 나돌게 된 것이다. 부모의 사랑에 굶주린 상태에서 그를 이해해주고, 어울려주는 같은 처지의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편하게 여겨진 것이다. 그러다보니 가정도, 학교도, 공부도 그에게는 관심 밖의 일들이 돼버렸다.

말썽꾸러기가 울먹이며 토해내는 가슴 깊이 묻어둔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순수한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는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면 이렇게까지 빗나가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순간 성규가 너무나 가여워 보였다. 애써 눈물을 훔치며 그를 꼭 안아줬다. 부족하지만 빈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를 ‘담임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 생각해주면 어떻겠느냐’는 조심스런 제안을 했고, 성규는 의외로 쉽게 수긍했다. 앞으로 다시는 말썽 부리지 않고, 학교생활을 잘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아울러 방과 후에 당분간 우리 집에서 매일 두 세 시간 정도 함께 생활하기로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했다. 큰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성규는 다음날부터 우리 집으로 퇴근해서 함께 지냈다. 우선 공부에 흥미를 갖도록 하기 위해 수학이며, 영어 등 기초적인 것들을 가르쳐 줬고, 내 자녀들과도 비슷한 또래이기에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해줬다. 주말이면 우리 집 아이들과 함께 놀러 다니는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학기 정도 지냈더니 성규의 얼굴에서 웃음을 발견할 수 있었고,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동료 선생님들께 도움을 청해 수업 시간마다 이름도 불러주고, 칭찬도 해달라는 부탁을 해 선생님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학급 간부(생활부장) 자리도 하나 맡겨 줬더니 신이 나서 헌신적으로 학급을 위해서 일을 하는 등 행동의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야생마처럼 본성을 드러내는 일들이 끊이질 않았다. 곡예사의 외줄타기처럼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중2때 시작된 인연을 끊지 않고, 3학년 때도 담임을 자청해 함께 지냈다. 학년말이 돼 고교 진학이 가까워지자 성규의 어머니는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긴다며 도장을 두고 갔다.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다른 곳으로 진학시키자니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고, 과거의 그가 아님에도 워낙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터라, 우리학교(본교는 중․고 병설교임)에 진학시킬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 됐다. 진학을 알아서 시켜달라는데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 자체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심사숙고 끝에 본교 고등학교를 찾아가 모든 책임을 내가 지기로 할 테니 받아만 달라고 사정을 하게 됐고, 그 결과 성규는 우리학교 상업과에 진학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에도 성규는 잠재된 습성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나를 애타게 하는 일을 자주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중학교 때와 같이 그를 끌어안고 달래기를 반복하며, 고등학교 생활 3년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도왔다. 사실상 5년간 담임을 한 것이다. 또 성규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대로 자격증 두개를 취득하게 해서 떠나보냈다.

이렇게 가슴으로 품어 부화시킨 병아리 한 마리를 험한 세상으로 내보내게 됐다. 떠나는 그보다 떠나보내는 자신이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다. 돌이켜 보면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점철된 참으로 지루하고 힘들었던 인연이 아니었나 싶다. 이 세상을 떠나는 날 까지도 성규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이따금씩 성규와 함께했던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긴 터널을 빠져 나온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부족한 나와의 인연으로 그 말썽꾸러기를 그나마 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 줬다는 생각에 작은 자긍심도 갖게 된다. 30년 가까운 교직 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성규와의 인연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진실 된 마음과 진실한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을 크게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값진 교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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