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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겨레의 스승 김교신

올해는 김교신(1901∼1945) 선생의 서거 70주년 되는 해다. 그래서 양정의숙에서는 창학 110주년을 맞아 양정의 스승인 김교신 선생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한국 사학 교육, 김교신에게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포럼을 개최했고 필자도 논평자로 참여했다. 겨레의 스승인 김교신 선생의 교육적 삶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것이 예비, 현직교사들에게 교훈이 될 것 같아 몇 자 적어본다.

영적 교감 힘쓴 구도자의 삶

김교신은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양정고보(현재의 양정중·고)에서 13년간 손기정, 윤석중, 류달영 등과 같은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그는 정통 사범학교 교육을 받은 전문 교사였지만 종교적 신념에 입각해 인격적 감화와 애틋한 사랑으로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준 ‘훌륭한 평교사’였다.

그를 민족의 교사라고 하는 이유는 ‘조선성서연구회’의 멤버인 함석헌, 송두용 등과 함께 1927년부터 ‘성서조선’을 발간해 일제의 살벌한 검열과 통제를 받으면서도 1942년 폐간될 때까지 이 잡지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적 사회비평 활동에 나서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자기 확립의 자신감과 역사에 대한 책임 및 희망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성서조선’을 통해 조선인의 자긍심과 민족정신 그리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했던 김교신은 1942년에 최고의 사회 비판적 수필로 평가 받는 폐간호의 권두언 때문에 1년간 옥고를 치르게 됐고, 출옥 이후 강제징용을 피하기 위해 흥남 질소비료공장에 입사해 조선인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던 중, 발진티부스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신도 감염돼 1945년 4월, 젊은 나이로 그토록 염원하던 해방을 불과 4개월 앞두고 병사했다. 이처럼 김교신은 양정의 교사일 뿐만 아니라 민족의 교사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현장에서의 김교신은 어떠했는가. 김교신은 “교육은 인간의 귀중한 영혼에 관계하는 것으로 그 목표는 절대자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인격을 형성하는 것”이라면서, 그러한 교육은 스승과 제자의 인격적인 만남 가운데 진리를 함께 추구하며 인격적인 감화를 통해 ‘자기’를 형성해가게끔 하는 교육이라고 봤다. 즉 스승과 제자가 동반자로서 마치 종교적 구도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여겼다.

도쿄에서 제자 손기정과 베를린올림픽 예선전을 통과할 때 보여준 사제 간의 영적인 교감(만남)이 좋은 예다. 당시 손기정은 선도차에 탄 채 자신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응원하던 스승만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뛰어 우승했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스승과 제자 그 둘은 동일한 목적을 향한 구도자적 동반자였다.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었다. 줄탁동시(啐啄同時)였다. 그리고 그 교육적 효과는 엄청났다.

손기정 올림픽 금 이끈 동반자

플라톤(국가론 206~208)은 사제 간의 결합을 통해 진리를 공동으로 생산하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봤는데, 김교신과 손기정의 구도적 동반을 통해 우리는 사제가 진리를 공동 생산하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가.

교육의 성자라고 불리는 페스탈로찌는 “최선의 교육내용과 방법은 사랑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했다. 제자 사랑이 너무나도 애틋했던 김교신 선생은 ‘김교신이라는 인간 그 자체’가 최선의 교육내용이자 방법이었다. 교사는 교육내용과 방법에 선행한다. 김교신에게서 올바른 스승상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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