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1 꼭 추석 다음날 운동회를 하던 때였다. 그 어느 해 나는 역사가 깊다는 걸 자랑하는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훗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건국의 역사가 짧은 미국이 소중하게 가꾸면서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낡은 것들에도 역사성을 부여하며 돋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학교는 그동안 사용하던 교기를 낡았다는 이유로 상자 속에 집어넣으며 새로운 교기를 만들었다. 누구의 농간이었는지 그 당시로는 고가의 교기를 기증하는 사람이 있었고, 운동회 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대하게 기증식까지 했다.
그때 교기를 기증한 사람이 우리 반 학부형이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많았고, 그런 걸 빌미로 담임이 낯을 내도 무관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일 때문에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했었다.
사실 조회대 위에서 교장선생님과 학부형이 교기를 주고받는 모습부터가 내 눈에는 싫었다. 낡은 교기를 대신한다는 구실로 '비까번쩍한' 교기를 기증하며 낯을 내는 학부형과 그걸 자신들의 업적으로 치부하는 관리자 사이에 담임은 존재가치조차 없었다.
운동회가 끝난 후, 그동안 고생한 직원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까지 학부형은 교장선생님 옆에서 교기 기증자로 낯을 냈다. 그 일을 지금까지 못 잊게 하는 것은 다른 데 있었다. 교기 기증자인 학부형에게 소주 한 잔 따라주면서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담임의 의무라는 교감선생님과 목에 힘이나 주면서 담임을 무시하는 학부형에게 그럴 수 없다는 나의 신경전이 팽팽하게 이어지며 미움을 자처했었다.
이야기 2
어제 학부모 한 분으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즉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괴롭힘을 당해 화가 났다는 것과 그 현장에 담임이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할 수 있느냐는 얘기였다. 학부모가 얘기하고 있는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옆에서 보고 방관했다며 서운해 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아이가 괴롭힘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니 학부모로서 오해를 할만도 했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도록 방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반의 모든 아이들을 괴롭히는 아이가 있는데 방관할 담임이 어디 있겠는가.
폭력적인 아이들을 관찰해 보면 평범하지 않은 게 많다. 우리 반 아이들이 성토하는 아이도 그렇다. 5학년 답지 않게 머리가 비상하고, 작은 몸집이지만 체력검사 제자리멀리뛰기 기록이 5,6학년 전체에서 제일 좋을 만큼 운동 신경이 뛰어나다. 어쩌면 제 스스로도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만큼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다. 자기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만큼 자기중심적이고 눈치가 빨라 합리화를 잘 시킨다.
이런 아이를 어떻게 짧은 시간에 사람을 만들 수 있겠는가? 교육이 그렇게 간단하면 어떻게 전문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를 담임하는 올 일년이 나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시간이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때로는 칭찬하면서 다음 담임이나 친구들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만드는 것이 현재 나에게는 가장 큰 바람이다. 그런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들이 어제와 같이 나를 어렵게 하기도 한다.
문제는 아직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이 아이의 엄마가 작년도 자모회장이었다는 것이다. 올해 전근 온 나로서는 운동회 날 조회대 위에서 감사패를 받는 뒷모습만 봤을 뿐이다. 그런 날 담임하고 아이의 생활에 대해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윗사람들보다 담임이 아이의 생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텐데...
벌써 20년도 더 지난 얘기를 지금에 와서야 해가며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자는 것도, 담임이 하고 있는 고생을 부모가 몰라주는 것이 서운해서도 아니다. 그런 일들이 지금도 벌어지는 게 현실이고, 아이가 잘못 전해주면 담임이 오해받을 수 있는 일들이 많은데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도 않은 교원평가가 도마 위에 올라 있어 안타깝기 때문이다. 더구나 칼자루를 쥔 사람들에게 교원들은 팔딱팔딱 뛰고 있는 생선에 불과한데 여론에서마저 빨리 칼을 내려치라고 요구하고 있기에 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