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교육과정에 의해서 고등학교 2, 3학년 학생이 선택하도록 되어 있는 '한국 근·현대사' 과목의 최근 검정 교과서 파동은 우리 모두에게 중대한 문제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고 관계 당국에게는 이번 파문을 계기로 노출된 문제점을 간과하지 말고 보다 높은 안목을 가지고 멀리 내다보면서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라는 경고 신호를 보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것은 수많은 과목의 검정 교과서 중에서 역사 교과서였다. 또 역사 교과서 중에서도 '근·현대사'과목이었기 때문에 현 통치체제에 직접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정치, 사회, 언론, 국민 등 모두가 더 깊은 관심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처럼 예민한 체제의
이해관계 때문에 더욱 우려와 비판이 높았고 여러 가지 의혹, 억측, 갈등, 과장, 오해 등도 따랐다.
그래서 한 과목의 검정 교과서를 대상으로 편향 기술의 의도성과 고의성, 검정 방법 및 과정의 적절성과 투명성, 문제된 교과서 내용의 교육적 타당성과 적합성 등이 비판자의 입장 본위로 제각기 논의되었다. 또 검정 제도와 방법의 개선 방향까지 깊은 연구와 검토도 없이 즉흥적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근·현대사' 한 과목의 국부적인 표현 문제를 둘러싼 비판과 책임 추궁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편협한 시각과 임기응변 식 대처에 그쳐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들여다 보아야하고 장기적인 대책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제언하고 싶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이와 유사한 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국민의 기본적 자질과 능력을 기르는 기초 공통교육(초·중등교육)에 대해서는 국가가 교육권을 행사하여 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교육과정의 국가기준을 정하고 이에 필요한 교과서와 교육자료를 제공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다. 통상 이러한 일을 교육내용행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중앙 교육행정에서는 이처럼 중요한 교육내용 행정이 거의 부재상태인 것이 이번 검정교과서 사건의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 수립 후 초·중등 교육의 핵심적 부분인 교육내용과 질을 관리하기 위해서 연면히 그 중요 기능을 수행해온 편수국과 각 교과를 담당하여 지속적이고 전문적으로 조사·연구하는 교육내용 행정가인 편수관이 정부 조직에서 살아진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국가가 당연히 책임을 지고 공인하고 검정해야 할 업무를 민간 연구기관에 무책임하게 위임해 놓고 '장소를 마련해주고 물이나 떠다주는 잔심부름하는 기관'에서 이를 수행하게 한데 그 원천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주무장관은 교육내용 행정 주관 국장도 담당관도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책임 있게 보고해줄 참모도 없고, 질문하고, 의견을 듣고 업무를 지시할 권위 있고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도 부내에서는 만날 수 없게되어 있다.
이처럼 초·중등학교의 교육내용을 일관성 있고 심도 있게 조사 연구하고 관리해야 할 교육내용행정이 마비된 상황 속에서는 비단 이번처럼 역사 교과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타 교과에서도 이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언제든지, 얼마든지 속출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미 어느 교과에선가 그 문제의 심각성이 위험 수위를 넘어 시급한 개선과 대책이 마련되어야 함에도 언론이나 정치권 등에서 문제 삼지 않고, 비판하지 않으니 그대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골병들고 부서지는 것은 누구이겠는가?
장차 대한민국을 짊어지고 나갈 천 만 명에 달하는 우리 학생들이다. 그리고 납세자이고 학부모인 국민이고, 우리나라의 미래인 것이다. 우리 학생들에게 과연 이런 것을 가르쳐도 좋을 것인가? 또 그것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와 같이 교육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전문적인 대답을
조사·연구하고 관리하는 전문적이고 권위 있고 유능한 교육내용 행정가와 그들이 그처럼 중요한 업무를 안정적으로 장기간 보람있게 수행할 수 있는 전문 부서를 교육인적 자원부에 조속히 설치해야 한다.
그 일을 책임 있게 추진하는 길이 이번 검정교과서 파동의 교훈을 살려서 더 큰 교육적 손실과 불행을 미리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곧 교육개혁의 확실한 길이고 국가 경쟁력을 키우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