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세모가 되면 나는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 설계를 하곤 했다. 옛날 중학교 때의 일이다. 중학교 1학년이 거의 끝나고 2학년으로 올라가기 전 연말이었다. 어떤 동기에서 그랬는지 기억에 없지만 내년에는 꼭 학급에서 일등을 해 보아야겠다 하고 혼자 마음으로 다짐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 비록 일등은 아니었지만 이등을 했던 것이다. 그 후 나는 이 일을 두고 새해의 다짐과 그 결과물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지금까지도 자못 재미있는 기억으로 여기고 있다.
그 후로 해마다 연말이 다가오면 제일 먼저 일기장을 준비하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그리고는 일 년 내내 일기를 쓰며 나의 독서상황을 기록하고 나의 꿈을 확인하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일은 나중에 내가 성인이 되어 시와 산문을 쓰게 되었을 때 상당히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노총각 시절이었는데 새해에는 꼭 결혼을 해야 되겠다 하고 다짐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약속이 이루어져 노총각을 면하고 가정을 꾸리게 된 일이다. 이런 것을 가리켜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해의 다짐도 불혹의 나이가 지나고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면서는 흐지부지 되었는데, 아마 잡다한 세상사로 인하여 나의 꿈이 많이 좌절을 겪은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 근 십년은 되었을 것이다. 내가 연말이 오거나 새해가 되어도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이 말이다. 허겁지겁 아이들 뒷바라지에 신경 쓰고 경제문제에 매달려 노심초사했을 뿐인 것이다. 그 사이 벌써 나이를 먹어 오십 후반에 들었으니 이를 이제 어쩌겠는가. 그런데 세모가 가까이 다가오는 요즈음 내 마음에 어떤 변화가 오는 것을 감지했다.
가만히 보니 옛날 젊었을 때와 같이 지나간 한 해에 대한 반성과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다짐 같은 것이 아닌가. 모처럼 다시 가져보는 나 자신의 발견이라 할까. 한편 신선하기 까지 하다. 더군다나 곰곰이 심사숙고 하여 새해의 다짐을 세워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어떤 다짐 같은 것이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들어앉는 것이 아닌가. 저절로 들어와 자리하는 새해의 다짐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래 모처럼 나는 새해의 다짐을 세워보았다.
우선 새해에는 욕심을 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런 저런 잡다한 욕심에 내가 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동안 내가 유별나게 욕심을 부리며 살아왔다는 얘기는 아니다. 가난한 교사로 서민 아파트에 살면서 항상 부족을 느끼며 살아왔을 뿐이다. 새삼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 하는 것이 오히려 생소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드려다 보면 내 마음에도 많은 욕심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제 그런 거 떨쳐버리고 마음을 좀 비우겠다는 뜻이다. 안분지족이란 말이 적절할지 모른다.
먼저 나는 항상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왔는데 이젠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고 하기보다는 진실하고 소박한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종일 근무하고 퇴근하면 파김치가 되는 생활인데 유명한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계속 갖는다면 아무래도 그것은 욕심이 될 것이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과욕이 될 것이다. 그래 분수에 맞게 꿈을 낮추어 조절하겠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고 아름다운 것을 진실하고 소박하게 쓰고 싶은 것이다.
또 나는 경제적인 욕심도 버릴 작정이다. 평생을 교직에 몸담고 박봉을 쪼개어 살아왔으면서 아직도 경제적인 여유를 바란다면 그것은 격에 어울리지 않을 것은 자명한 일 아닌가. 간신히 연명하다시피 지내왔으면서 부자 될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미련한 짓이 되기도 할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벌 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꿈을 버리든지 낮춰 갖는 것도 지혜가 되지 않겠는가.
마음 한 구석에 계속 돈 욕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돈을 벌려면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박봉으로 살아가면서 거기에 맞춰 만족하지 않고 마음속에 욕심만 가지고 있다면 그것도 좋은 처세는 아닐 것이다. 이제부터는 돈보다는 다른 것에서 성취감을 느끼며 살아야 하겠다.
주변에 보면 주식을 사고 혹은 집을 팔아 전세집으로 옮겨 다니며 아파트 분양을 신청해서 더러 성공한 분들도 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그렇게 해본 적이 없다. 우직하게 서민아파트에 눌러 살았고 단 한 번도 주식을 사본 적이 없다. 그래 돈을 벌지도 못했지만 돈을 잃지도 않았으니 손해는 아닌 것이다. 집을 팔아 주식을 샀다가 급기야 집까지 날리고 빈 털털이가 된 동료도 있으니 말이다.
나는 가끔 이제 밥이야 굶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게 된 것을 퍽 다행으로 생각한다. 아마 우리 세대가 다 가난하던 시절을 살았던 세대라 그럴 것이다. 그러면서도 누가 병이라도 나면 금세 휘청거릴 것 같은 위기감을 아직 다 떨쳐버린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젊었을 때 보다는 다소 나으니 새해에는 돈에 대한 욕심은 좀 덜어내고 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바로 어떤 경우에라도 학생들을 사랑으로 대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명년에 실천해 보고 또 하나 좌우명 같은 것이다. 물론 초지일관 실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적지 않은 연륜을 교직에 있으면서 시행착오도 많았고 감정을 폭발시켜 본분을 망각한 적도 많았다.
아이들의 수업태도나 생활태도가 거슬릴 때면 욕설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체벌을 가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자각이 드는 것이다. 학생들의 마음의 행간을 읽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청소년 시절의 잣대로 요즘 학생들을 바라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교수방법을 연구하고 학습 동기를 유발시킬 방법을 강구했어야 했다.
어떤 새로운 전환점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정년도 몇 해 안 남았는데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어떤 새로운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는데 바로 학생들을 사랑하자는 것이었다. 소란을 피우는 아이들, 잠만 자는 학생들, 성적이 나쁜 아이들 모두를 사랑하자는 것이다. 절대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체벌을 가하지 말고 책임을 아이들에게 전가하지 말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자.
그러려면 아이들을 이해해야 하고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모욕감을 느끼게 될 때라도 그 원인을 내게서 찾고 학생들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자는 것이다. 학생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여 훈훈한 사제의 정을 나누면서 교육에 임하자고 다짐을 해보는 것이다. 여러 번 시행착오를 겪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꼭 한번 노력해보고 싶다. 안 되더라도 계속 노력해볼 것이다.
옛날에 읽은 신문의 가십 기사가 잊어지지 않는다. 미국에서 한 선생님이 담임을 했던 아이들이 한결같이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하는 사례가 있어 한 기자가 수소문 하여 그 선생님을 찾아가 그 교육방법을 물었다는 것이다.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그 선생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더라는 것이다. 바로 자기는 학생들 하나하나를 모두 사랑으로 대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 짤막한 신문 기사가 왜 오래도록 잊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요새 그 분의 말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내가 그 동안의 교육 경험에서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식물이 수분과 온도와 햇빛이 있어야 잘 자라듯이 교육에서는 사랑이 그와 같을 것이다. 충분한 사랑을 받을 때 아이들은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자랄 것이다.
한동안 새해가 와도 특별한 계획이나 다짐 없이 지내다가 올 연말엔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두 가지 생각이 떠올라 적어보았다.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서 욕심을 좀 덜어내고 안분지족의 여유로운 마음으로 살아볼 작정이다. 또 아이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여 감정을 폭발시키거나 책임을 아이들에게 떠넘기지 않을 작정이다. 이것이 잘 실천된다면 교직생활의 작은 보람 혹은 결실이 되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