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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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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새학기를 준비하며 체력을 다진다

오후에 접어들자 햇빛은 더욱 투명해 졌다. 창문으로 바라 뵈는 저 쪽 아파트 담장으로 밝은 겨울햇살이 환하게 쬐여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나는 또 운동을 하러 나갈 참이다. 지난 봄 사이클을 본격적으로 타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경주용 자전거를 새로 구입하고 헬멧과 사이클용 안경 등 몇 가지 장비를 갖추었다. 들꽃들이 무더기무더기 피어있던 봄 길을 달리며 부드러운 봄바람을 온몸으로 맞기도 하고, 5월 하순엔 탐스러운 아카시아 꽃길을 달리며 그 꽃잎을 따서 입에 넣고 꾸역꾸역 씹으며 동심에 젖기도 했다. 진달래꽃과 더불어 아카시아꽃은 어렸을 적에 많이 따먹었던 꽃이다.

한여름에 접어들었을 때도 나는 그 뙤약볕 속을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렸었다. 더위는 피한다고 피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조금만 더우면 에어컨을 켜고 선풍기를 돌려대는 것보다는 그 더위에 몸을 내 맡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걸 나는 터득했다. 조금만 더우면 덥다고 투덜거리며 냉장고 문을 여닫고 바닷가나 계곡으로 피서여행 떠날 생각을 하기 보다는 땀이 줄줄 흐르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그 열기에 내맡기는 것이 나의 피서법이다. 그래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나는 자전거를 타고 들녘을 달렸다. 오히려 인적 드문 곳에선 웃통을 다 벗어 붙이고 잔등을 새카맣게 태우며 뙤약볕 속 들녘을 달렸다.

가을에도 나의 들녘 사랑은 여전했다.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들녘, 길가엔 코스모스가 긴 행렬을 이루어 피어있고 해바라기가 가을 하늘 아래 탐스럽게 피어 고향의 운치를 자아내기도 했다. 봄, 여름, 가을이 지나 이젠 한겨울이 찾아왔다. 폭설이 내려 들녘을 하얗게 덮더니 지금은 강추위가 몰아쳐 살을 에일 듯이 바람이 맵다. 상당한 비용을 들여 상하의 겨울용 사이클 복장을 준비하니 완벽하다. 아무리 추워도 얼마든지 나설 수가 있다. 코끝이 시려 자전거포에 가 3만원을 주고 코와 입 가리개를 구입했다. 그것을 목에 두르고 헬멧을 쓰고 거울을 보니 저 이라크의 무장단체 알카에다 조직원처럼 눈만 반짝거린다. 설마 나를 알카에다의 조직원으로 보랴. 아니 복면을 한 은행 강도로 보기야 할 것인가.

나는 자전거를 끌고 아파트를 나선다. 경비아저씨가 늘 하는 인사를 건넨다. 운동 나가시는군요. 나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을 지나 채 5분도 안 돼 장수천 둑길로 들어선다. 10여분만 더 달려 나가면 거기 드넓은 벌판이 사시사철 나를 기다리고 있다.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으로 가면 소래까지 이어지는 긴 자전거도로가 있고 왼쪽으로 접어들면 꼬불꼬불 이어지는 운치 있는 농로를 만난다. 농로라고 해도 자전거 두 대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포장이 돼 있어 자전거타기엔 일품이다. 지난여름 장마 땐 이 논배미에도 홍수가 났었다. 논두렁이 모두 물에 잠겨 거대한 저수지를 이루었었다. 그 저수지 같은 물에 물오리들만 무심하게 헤엄을 쳤었다.

몸에선 벌써 열이 난다. 구부러진 논길을 휘 한 바퀴 돌아 갈대 무성한 갯벌길로 접어든다. 갯벌이래야 지금은 바닷물길이 끊겨 육지로 변한지 오래되어 인천시 남동구가 수도권 해양생태공원으로 조성한 곳이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염전이 남아 있어 인부들이 구슬땀을 흘리며 열심히 소금을 만들고 있었다. 이젠 이 갯벌을 가로 질러 길게 6차선 도로가 개설 중에 있어 염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여기저기 무너지거나 불에 탄 소금창고만이 옛 자취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갈대 우거진 벌판에 5월이면 개구리들이 목청을 돋구어 합창을 하고, 때론 장끼란 놈이 푸드득 하고 코앞에서 날아오르기도 한다. 봄엔 이따금 뻐꾸기가 날아와 자지러지게 울기도 하는 것은 아마 제 새끼를 키워줄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이 들녘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뻐꾸기는 탁란(托卵)이라 하여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아 부화시킨다지 않는가. 높이 떠서 꼼짝도 않고 지상을 응시하던 황조롱이가 갑자기 몸을 내리꽂아 들쥐 한 마리를 낚아채 오른다.

들녘엔 온통 겨울햇살이 지천이다. 추수가 끝난 논바닥엔 까치와 멧비둘기가 정답게 모이를 쪼고, 지난 5월 향내를 진동시키며 탐스럽게 꽃을 피우던 길가 아카시아 나무는 앙상한 알몸으로 긴긴 겨울잠에 빠져 있다. 이제 막 시흥 앞 벌판으로 접어들려는데 저만치 논바닥에 거뭇한 물체가 보인다. 저것이 무엇일까. 자전거를 세워놓고 들어가 보니 죽은 너구리다. 그 놈의 몸을 젖히고 살펴보니 목덜미에 피가 엉겨 있다. 누군가의 총에 맞고 도망을 가다가 이 논바닥에서 기진하여 죽은 게 틀림없다. 누구의 소행일까. 한번은 어둑어둑해서 늦게 자전거를 타는데 온 몸을 누더기로 위장을 하고, 겨울 오리를 잡기 위해 오리의 잠자리였던 물 논배미 옆에 잠복하고 있던 밀렵꾼을 보고는 혀를 찼던 일이 있다. 개중엔 그런 무신경의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죽은 너구리를 논바닥에 놓아두고 나는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오래 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나보다 다서 살 위인 사촌형이 연을 날리다가 연줄이 끊어졌다. 멀리 아주 멀리 연을 찾으러 갔다가 눈구덩이 속에 죽어 있는 동물 사체를 발견했다고 했다. 개 같기도 하고 늑대 같기도 한데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사촌형은 그 죽은 동물을 안간힘을 다하여 어깨에 메고 집에까지 왔다. 집 마당에 갖다 놓았는데 어른들이 보더니 그것이 늑대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개처럼 생긴 커다란 회갈색의 동물의 사체. 아마 내장을 모두 발라내고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삶아 갖은 양념을 해서 동네 청년들이 먹었을 것이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희미한데 아마 그랬을 것이다.

겨울햇살은 아직도 들녘에 밝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핸드폰의 진동이 전해져온다. 자전거를 세우고 전화를 받는다. K다. 선생님, 선생님 하며 나를 따르는 K. 옛날 시골학교 교사로 가 있을 때의 제자다. 이십여 년이 지나 다시 만나 이제는 벗처럼 말동무하며 지내고 있다. 솔직담백하고 쾌활한 성격이 평생 친구로 지내도 한없이 좋기만 할 제자 겸 벗인 것이다. 이런 일 저런 일 아무 구김살 없이 허심탄회하게 심중을 털어놓기도 하고 나의 의견을 구하기도 하는 착한 친구다.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하니 이 추위에 운동을 하느냐며 놀라는 기색이더니 점심을 한 번 내겠단다. 그러마고 나는 쾌히 승낙하였다. 만난 지도 오래 되었으니 한 번 만나보고도 싶다. 전화를 끊고 다시 투명한 겨울햇살 속으로 미끄러져 간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길목엔 커다란 웅덩이가 있다. 지금은 물이 얼어붙고 갈대와 잡초가 이리저리 쓰러져 얽혀 있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물닭들과 실랑이를 벌이며 낚시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지금 쯤 그 물닭들은 어디로 가서 겨울을 나고 있을까. 어린 물병아리들이 쪼르르 헤엄을 치다가 사람의 기척만 보이면 물속으로 순식간에 숨어들곤 했었는데, 지금은 윙윙 한겨울 찬바람만 얼음 위를 내달리고 있다. 저만치 인근엔 청룡저수지가 있다. 이곳은 학교 운동장 스무 배는 되는 큰 저수지로 사시사철 낚시꾼들로 붐비는 곳이다. 겨울에도 어김없이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을 볼 수 있는데 요새는 아니다. 저수지가 꽝꽝 얼었기 때문이다. 나는 또 자전거를 저수지 둑에 세우고 조심조심 들어가 얼음의 두께를 확인한다. 끄떡없다. 나는 점점 가운데로 들어간다. 얼음은 두껍게 얼어 있었다. 이럴 때 썰매라도 있다면, 아니 막내딸을 데리고 와 신나게 미끄럼을 타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컴퓨터와 핸드폰이 유일한 오락거리요, 학원 다니느라고 찌든 요즘 아이들이 가여워진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저 자연 속에서 뛰놀며 건강한 심신을 다질 수 있을까? 저수지 둑에는 3개의 오두막이 있다. 라면을 끓여주고 음료수를 파는 집이다. 한 채는 문을 걸어 잠그었다. 봄이 오길 기다리며 어디선가 겨울을 나고 있을 것이다.

벌서 두어 시간이 지났다. 일제가 소금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들었다는 부인교(富仁橋)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들어가야겠다. 갯고랑 위에 놓인 부인교에 이르니 갯고랑으로 밀물이 밀려들어온다. 지난 5월에는 이 다리 위에서 낚시꾼들이 팔뚝만한 숭어를 여러 마리씩 건저 올리기도 했는데 지금은 겨울 오리들이 차가운 물속에서 자맥질을 하며 먹이 찾기에 분주하다. 저 오리들은 어떻게 그 조그만 몸뚱어리로 차가운 물속에서 먹이를 구하며 혹한을 견디는 것일까. 새삼 자연의 경이로움에 숙연해진다. 다리 위에서 한동안 오리들의 자맥질을 보다가, 밀려들어오는 바닷물을 구경하다가 생태공원의 쉼터로 간다. 거기엔 벤치가 있고 음료수 자판기가 있다. 200원으로 율무차 한 잔을 뽑아든다. 따뜻한 율무차가 목을 축인다. 오늘이 1월 22일, 동지가 지난지도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이제 머지않아 입춘도 다가오리라. 차를 마시며 잠시 쉬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도 해는 아직 한 뼘이나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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