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에 교단에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만나면 행하는 통과 의례(通過儀禮)가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리끼’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학생들은 나의 엉뚱한 질문에 곤혹스러워하며 당황해 하기도 하지만 호기심어린 눈으로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몇몇 학생이 어감(語感)에서 느끼는 예측성 대답이나 혹은 엉뚱한 대답으로 실소(失笑)를 자아내기도 한다.
‘자리끼’는 '밤에 자다가 마시기 위하여 잠자리의 머리맡에 준비하여 두는 물'을 말한다. '자리'는 잠자리의 준말이고 '끼'는 끼니를 말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잠자리에서 먹는 끼니'가 바로 자리끼다. 그리고 밤을 지낸 자리끼를 "밤잔물"이라고 부른다. 밤에 잔 물이니 밤잔물이다. 한 대접의 물일 뿐인 자리끼. 그렇지만 마시는 사람들에게 목마름을 씻어주는 자리끼,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실 ‘자리끼’는 우리 조상들의 효(孝)와 사랑과 지혜(智慧)가 담겨진 아름다운 문화이자 언어이며 전통이다. 그런데 이런 소중하고 아름다운 말을 요즘 점차 잃어가고 있다. 아니 무관심 속에 우리 기억의 저편으로 내 던지고 있다. 이렇게 조상들의 아름다운 얼과 혼이 담긴 전통 문화가 설 자리를 잃은 채 홀대 당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요즘 우리 젊은이 가운데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여쭙고 자식이 된 자의 도리를 다하는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자리끼’는커녕 웃어른에게 문안 인사(問安人事)도 제대로 다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실상이다. 더군다나 자신의 잠자리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가?
인터넷 시대, 첨단 영상시대를 달리는 요즘, 젊은이들은 컴퓨터에 푹 빠져 버렸다. 많은 학생들이 컴퓨터 오락에 매달리다 보니 늦잠을 자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결국은 학교에 지각하는 사태로 이어지고 아침이면 교무실 전화는 온통 통화중이다. 학생들에게 모닝콜을 해주는 것이다. 요즘 교육현장에서 가장 골치를 앓고 있는 부분 중 하나다. 상아탑으로 불리는 대학에서도 강의시간에 학생들이 너무 많이 빠져 교수님들이 직접 기숙사로 달려가 깨우는 상황이라는 탄식 섞인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컴퓨터 게임 때문에 벌어지는 불협화음이 적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자리끼’는 핵가족 시대에 부모를 어떻게 섬길지 모르는 젊은 세대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
‘자리끼’에는 부모를 향한 공경과 사랑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옛말에 혼정신성(昏定晨省)이란 말이 있듯이 저녁엔 부모의 잠자리를 돌보아 드리고 아침에는 부모의 안부를 살핀다는 의미이다. 이 아름다운 풍속은 요즘 핵가족 혹은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되어 버렸다.
<소학(小學)>을 살펴보면, 중국 진나라의 왕연(王延)의 효(孝)를 찾아볼 수 있다. 왕연은 부모를 섬김에 있어서 온화하고 즐거운 안색으로 봉양하였으며(事親色養), 여름에는 베개와 자리에 부채질을 하여 시원하게 해 드렸다(夏則扇枕席). 겨울에는 자신의 몸으로써 부모님께서 주무실 이불을 따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冬則以身溫被) 시시때때로 부모님께 맛있는 음식을 극진하게 대접해 드렸다(而親極滋味)고 했다.
요즘 왕연처럼 몸소 효를 실천하는 사람은 차치(且置)하고라도 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간직한 이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자리끼’는 부부간의 사랑을 담고 있다. 과음으로 인한 갈증이나 부부의 사랑을 교환한 후에 자리끼는 청량음료였을 것이다. 부부간의 사랑의 마음으로 준비하고 위해 줌으로 공경하는 이 아름다운 모습은 ‘자리끼’를 통해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배어 있는 것이다.
자리끼에 대한 한 토막의 옛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고을에 학식(學識)이 뛰어나고 인품(人品)이 너그러운 장래가 촉망되는 양반집 자제(子弟)가 있었다. 어느 날 자제가 성년이 되어 서울의 지체 높은 양반집 외동딸과 혼인을 하게 이른다. 외동딸은 부모가 애지중지 키운 귀한 딸이었다. 그러다 보니 양반집의 예의 법도를 글로 배우긴 했지만 몸소 실천하는 경우가 적었나 싶다. 아무튼 모든 혼인예식을 마친 후에 신혼 초야(初夜)를 맞이하게 되었는데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혼인예식으로 피곤에 지친 신랑은 어스름한 새벽녘에 갈증을 느꼈다. 그날따라 어찌된 일인지 신혼부부의 방엔 자리끼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대사(大事)를 치르다 보니 아랫사람들이 미처 자리끼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신랑은 어쩔 수 없이 신부에게
“부인! 자리끼를 준비해 주시오”
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신부는 ‘자리끼’를 모르고 있었다. 그 탓에 야식을 준비하는가 싶더니, 자리끼를 가져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엉뚱한 행동으로 안절부절 못하였다. 신부는 결국 신랑에게 자신의 무지를 고하면서 ‘자리끼’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기를 소원했다. 하지만 신랑은
“어찌 명문대가(名門大家)의 아녀자(兒女子)가 자리끼를 모른단 말이오. 부모 봉양(奉養)은 물론이고 지아비를 섬기는데 무지한 아녀자는 필요 없소”
하며 심하게 질책했다. 그리고는 그 즉시 처가를 떠나 가버렸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은 신부는 곧바로 시비(侍婢)를 데리고 성문을 나서 성 밖의 외진 곳에서 부덕(婦德)을 쌓기에 전념한다. 김장을 담그는 일에서부터 모든 빨래를 손수 다하는 것은 물론 학문 수양에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몇 년의 세월이 지난 후, 신부는 남편을 찾아가 용서를 빌고 지아비를 내조하게 된다. 지아비는 영의정에 올라 나라의 중요한 일을 감당하는 명재상으로 이름을 떨친다. 더불어 신부는 남편을 바로 내조하여 그 시대의 뛰어난 효부(孝婦),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칭송(稱頌)을 받기 이른다. 물론 자녀들에게도 훌륭한 어머니가 되었음은 자명(自明)한 일이다.
요즘 ‘자리끼’의 의미조차 모르는 우리 젊은이들이 너무나 많다. 부모에 대한 효를 강조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옛 이야기를 하냐며 코웃음을 친다. 더욱이 유교적이며 보수적인 발상(發想)이 아니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하지만 ‘자리끼’는 우리 민족의 지혜를 담은 아름다운 전통문화임에 틀림없다. 이를 계승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다. 이제는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을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요즘 부모에 대한 효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소홀히 여기고 있다. 그만큼 가족간의 참다운 사랑과 존경의 가치도 상실해 가고 있다는 증거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많은 사람들이 설왕설래(說往說來)한다. 학벌위주의 출세주의와 입시 위주의 교육으로 인해 인성교육이 잘못되었느니 지적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 근본적인 치유는 바로 어른 된 우리가 먼저 그 모범을 보이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늘도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만난다. 나를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소귀에 경 읽기가 될지언정 ‘자리끼’의 의미를 되새기는 수업을 다시금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