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중순, 새 학기의 한 달이 지나자 각 교실에서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낯선 친구들과 친숙해지면서 서로의 감정들을 나누는 시간들이 늘어난 것이다.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는 친구도 있고, 침 튀겨라 열변을 토하는 친구도 있다. 참으로 정겹고 반가운 모습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펼치는 모습은 많지만, 타인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모습을 만나기기 그리 쉽지 않다.
"듣는다"의 의미의 한자 "들을 청(聽)"자을 살펴보면, 귀(耳)로 듣는 것에 왕(王)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듣는 일에 눈(目)을 맞추친다는 의미도 담겨 있고 한 마음(一心)으로 집중해서 들으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 학생과 학생의 관계 형성은 일차적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음에서 출발한다. 힘겹고, 어려운 일에 처한 상황을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지지할 수 있다. 어쩌면 일차적인 심리치료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타인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긴밀히 연결하는 고리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약1:19)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던가. 믿음은 들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칼 로저스(Carl Rogers)도 상대방의 사연을 듣기만 해도 문제의 50%가 해결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말을 하는 동안에 상한 감정이나 아픈 마음이 정화작용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하엘 엔데(Michael Ende)가 쓴 소설 <모모(MoMo>에서도 `진정한 듣기의 위력’을 만날 수 있다. 주인공 모모는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모모의 집에는 언제나 손님들이 끊이질 않았다. 언제나 누군가와 앉아서 열심히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했을까? 모모가 누구에게나 좋은 충고를 해 줄 수도 있을 만큼 똑똑하지도 않았다.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꼭 맞는 말을 해 주는 사람도 아니었다. 현명하고 공정한 판단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어린 아이였다.
단지 모모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재주가 있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거나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이웃들에게 문득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그렇게 귀 기울여 들을 줄만 알았다. 누구나 모모에게 말을 하다보면 수줍음이 많은 사람도, 회색빛 인간도, 어느덧 거침이 없는 대담한 사람이 되곤 했다. 불행한 사람, 억눌린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주변 사람들은, 들어주는 이가 있었기에 얼굴이 밝아졌고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아픈 사연을 들어줄 어떤 이를 찾고 있는 것이다. 또래이든, 선생님이든, 아니면 학부형이든,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으로 경청해 주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TV와 컴퓨터와 대화를 나눌 뿐, 다른 이의 아픔이나 상황을 무시하곤 한다. 참으로 이기적인 눈가림이고, 귀가림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있다. 이들을 지지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고 받아주는 것이다. 가슴을 열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귀 기울여 들어주고, 그 상황을 받아주면서 인정해 주면 어떨까? 그러기에 듣는다는 것은 곧 관심이고 사랑인 것이다.
기본적인 사랑은 다른 이의 말을 소중히 들어주는 것에서 출발한다. 좋은 선생님은 학생들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귀 기울이는 분이다. 좋은 친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한 친구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좋은 학부형은 학생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것이다. `척하면 삼천리`는 못되더라도 모모처럼 다른 이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많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학생이 건강해지고, 학교도 건강해지고, 마침내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지 않겠는가. 열린 가슴으로 귀를 기울여 들어보자. 모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