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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노후가 아름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순전히 예감이다. 내가 아직 중년의 나이에 있고 노년의 나이에 들어선 것은 아니지만 종종 그런 예감이 든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제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 50대 중반에 들어서이다.

10대적을 회상하여 보는 때가 있다. 사랑과 우정의 숨 막히는 변주곡이라 할까. 꿈과 희망의 시절임엔 틀림없다. 그 꿈과 희망의 행간에 우정과 사랑은 실로 장엄하게 펼쳐졌던 오케스트라였다. 그 시절 나는 우정과 사랑을 앓고 철학과 문학에 심취했었다. 장차 톨스토이도 될 수 있고 소크라테스도 될 수 있고 프란체스코 같은 성인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세였다.

현실세계에 대한 경험은 부족하고 오로지 책을 통해서 미래를 조망하고 꿈을 설정하던 미숙한 시절이었다. 이 시절에 맺어진 우정, 좋아했던 이성, 그리고 내가 받아들인 신앙은 내 인생의 귀중한 방향 설정이었다. 그 우정을 바탕으로 전우애, 동료애를 발전시키며 삶의 영역을 확대해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 시절 한 여학생에 대한 짝사랑은 내 낭만적 연애관을 수립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석과도 같았다. 열여섯 살에 입교한 가톨릭 신앙은 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판단의 준거를 제시하고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 시절 내 천주교 입교는 어머니가 독실한 신자가 되는 계기가 됐고 아내가 입교하고 아이들이 모태신앙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가정이 천주교 가정이 된 것은 소년시절 내 천주교 입교가 그 시작이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결코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되지는 않는다. 아버지가 이중살림을 하는 등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않았으며 공부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렸다. 연애도 짝사랑에 그치고 말았다. 열렬하게 짝사랑을 한 것도 행복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청춘만이 할 수 있고 해 야 하는 과제를 다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20대 적의 나의 삶도 갈팡질팡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허둥대고 말았다. 대학과 군대와 이성에 대한 관심으로 종횡무진 시행착오를 거듭했던 시절이었다. 사랑도 학문도 매끄럽게 성취하지 못해 후회를 간직해야 했다.

모든 젊음의 시행착오를 마치고 사회로 진출한 것이 30대다. 30대 초반 교직에 들어갔으며 결혼을 했다. 그러나 당시 사립학교 교사의 신분은 보장되지 않았으며 두세 번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고서야 비로소 교직생활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잦은 음주와 흡연으로 주변은 어수선했고 아내와의 결혼생활도 자주 충돌을 빚곤 했다.

30대 중반 글을 쓰기로 한 후에 새로운 과제를 갖게 되었다. 30대 후반에 시집을 출판하고 문단에 입문하여 문인들과 교유를 시작했다. 사춘기 적의 꿈의 한 자락을 다시 붙잡은 것이다.

40이 되었을 때 나는 무엇인가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할 것 같았다. 불혹의 나이를 들먹이며 새로운 정진을 다짐했지만 뚜렷한 전환점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며 화두는 시였다. 좋은 시를 쓰고 싶었다. 주로 인천의 문인들과 어울리며 문학과 인생을 논하고 술에 탐닉하던 시절이었다. 한 십여 년 완전히 술과 문학에 빠져 지낸 생활이었다.

40대 후반 쌍둥이 딸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는 시점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의 임종은 내게 엄청난 충격과 사고의 변화를 가져왔다. 평생을 함께 하실 것으로만 알던 어머니가 짧은 기간 병상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겉잡을 수 없는 후회와 사모의 정을 담아 추모시집을 출판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어머니 산소로 달려갔지만 돌아가신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셨다.

어머니의 훌륭한 아들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어머니만 생각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충실해야할 직장이 있지 않은가. 어머니 돌아가시던 해 낳은 늦둥이 딸의 재롱을 보며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삭힐 수 있었으니 하느님은 어머니를 부르시며 딸을 대신 보내주시어 나를 위로하신 것 아닌가.

바쁜 일상은 계속되었다. 쌍둥이 딸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스트레스를 겪었다. 딸의 교육문제로 아내와 충돌하는가 하면 다른 집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의 성적을 비교하며 비애를 느끼기도 했다. 학부모에겐 개성이니 뭐니 하며 이해하는 태도를 보이던 내가 내 자식 성적표 앞에서는 수없이 무너져 내렸으니 이 또한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점이 아닌가.

이제 50대 후반 요새 나는 내 인생에 잔잔한 안정기가 온 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점쳐보고 있다.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저희들 개성과 재주를 살려 각자 직장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고 넉넉하지는 않아도 굶지는 않게 되었으니 다소 걱정을 덜었다는 생각을 한다. 옛날 젊은 시절엔 어떻게 밥을 굶지 않느냐가 큰 관심사였다. 나를 짓누르는 부담이었다. 이제 그런 걱정에서 조금 자유로워진 것도 노후의 평안을 점쳐보는 이유 중의 하나다.

늦둥이의 학업문제로 또 속상하는 일이 있을까 우려되지만 노심초사 않기로 했다. 부모의 마음은 또 그렇지 않다는 걸 알지만 근심 걱정한다고 수월하게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는가. 남에게 많이 빠지지 않으면 그저 고맙게 생각하리라.

이제 먼 옛날을 떠올리며 글도 쓰고 자연 속에서 삶의 지혜도 배우고 여건이 허락하면 해외여행을 다니며 지구촌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고 들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아직 해야 할 책무와 과제가 있다. 정년이 4년 남짓 남았으니 유종의 미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싶다. 아이들의 혼사도 남은 과제 아닌가. 이 문제도 조금 여유롭게 신뢰를 가지고 지켜볼 것이다. 모든 일이 부모의 욕심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내 체력을 다지고 취미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좋은 글을 써서 공감을 얻는다면 흐뭇한 일일 텐데. 역시 노후에 해야 할 중요한 과제중의 하나다. 나는 아니라고 해도 남들은 내가 초로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노후를 즐겁게 보내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다. 노년이 축복의 시기임을 여러모로 체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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