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엄마가 실종되는 사건이 중심이다. 한 가족이 엄마의 실종이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상처받고 방황하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로 시작해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낱낱이 떠올리고, 거기에서 엉키는 감정의 동선을 천천히 따라가고 있다.
엄마는 시골동네에서 태어나 교육도 받지 못하고 오남매를 낳고 자식들만 바라보며 살아왔다. 이 땅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엄마다. 작가가 따라가고 있는 엄마의 기억은 평생 동안 일만하는 존재다. 소설의 화자인 너(딸)가 기억하는 엄마는 ‘쉴 새가 없었다. 엄마는 재봉질을 했고, 뜨개질을 했으며 쉴 새 없이 밭을 가꾸었다.(p. 69)’
엄마의 천벌 같은 일 중독증은 큰아들 형철이의 기억에도 맺혀 있다. 그는 삼십년 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몇 개월 뒤 이 도시의 야간 대학에 원서를 내려고 하니 고등학교 졸업증명서가 필요했다. 다음날까지 원서를 내야하는데 시골집에 전화도 없어서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한밤중에 동사무소 문이 쾅쾅 울렸다. 엄마가 그의 졸업 증명서를 직접 들고 올라왔다. 난생처음 서울에 올라온 어머니는 아들의 숙소인 동사무소 숙직실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첫새벽에 깨어보니 그의 엄마는 동사무소 바닥을 비질하고 있었다. 그가 말려도 엄마는 손은 뒀다가 뭐 한다니? 마치 손을 놀게 두면 누구한테 벌이라도 받는다는 듯 대걸레에 물을 적셔 바닥을 민 다음 출근 전인 직원들의 책상 하나하나를 구석구석 닦았다.(p. 95)’ 그것은 상식적으로 엄마가 할 일이 아니다. 아들의 직장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청소였지만, 엄마는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아들을 위한 엄마의 마음이다.
딸이 ‘에필로그’에서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은 ‘엄마는 상식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종내엔 자식들의 집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p. 260)’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평생 ‘머리가 깨지는 아픔’을 안고 산다. 이러한 헌신적인 아픔이 있었기에 아버지는 평생 밖으로 나돌며 살았고, 우리는 올곧게 클 수 있었다. 엄마는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p. 274)’이다. 엄마는 ‘인생에 단 한번도 좋은 상황에 놓인 적이 없던 엄마가 너에게 언제나 최상의 것을 주려고 그리 노력(p. 274)’하는 존재다.
근본적으로 선량함을 간직하고 있는 가족이지만, 엄마에게는 그러지 못한 기억이 펼쳐진다. 이는 한 가정의 좌절이라기보다는 엄마가 있는 우리 모두의 존재적 추락이다. 신경숙은 이러한 현실을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감도 높은 카메라로 투시하고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땅의 엄마는 노동과 희생의 폭력적 질서에 정체성이 왜곡되어 있다. 작가는 평생 고통 받고 상처 입은 엄마의 삶을 통해 엄마의 삶을 소홀히 하는 오늘의 시대를 주목하고 있다. 엄마는 언제나 우리 사회에서 소외받는 존재였다. 사회뿐이겠는가. 집안에서조차 고립된 존재가 엄마이다. 가족은 엄마의 부재를 통해서 자신들의 근원에 있는 죄의식과 위태로운 지금의 일상을 되묻게 된다.
작가는 일상의 욕망에 사로잡혀 엄마에 대한 사유와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가족의 군상을 통해 더 이상 모성의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항변하고 있다. 가족은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정작 엄마 자신은 ‘잘 있어요……난 이제 이 집에서 나갈라요.(p. 251)’라며 집안의 고된 일상에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신경숙의 창작 의도와 맞닿아 있다.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엄마에게 위로받자는 게 아니라 엄마를 위로하자는 소설(코리아플러스 2009년 2월호, p. 9)’이다. 이는 오빠가 ‘엄마의 일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 생각인지도 모른다. 엄마를 슬프게만 기억하는 건 우리 죄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p. 272)’라고 자책하는 말에도 암시되어 있다.
이 소설에서는 진정한 갈등을 발견하기 어렵다. 소설에 나타나는 모든 갈등은 각자의 내부에 깊게 침잠해 있는 엄마의 기억이다. 그것은 결코 밖으로 드러나서 외부 세계와 부딪히거나 분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 작가는 갈등의 표출보다 평범한 일상을 재발견하고 환기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소설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결코 흥분하는 법이 없다. 자신의 이야기를 정직하고 우직하게 풀어 나감으로써 보다 깊은 감동을 준다.
이 소설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점의 이동이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전통적인 소설의 서사 원리와는 다른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대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딸과 아들, 남편, 엄마의 관점에서 각 장을 구성했어요. 특이하게 ‘나’ 대신 ‘너’라는 호칭이 소설의 말미까지 이어지죠. 오직 엄마만이 ‘나’라는 호칭을 사용해요. 지금껏 가족만을 위해 살아온 엄마에게 ‘나’를 찾아주고 싶었거든요.”
작가가 시점을 자주 바꾼 것은 소설의 형식적 특징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 의식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이다. 즉 작가는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타파함으로써 기존에 가지고 있는 엄마에 대한 생각의 틀도 깨고자 하는 뜻에서 시점을 다양화한 것이다.
그 덕분에 독자는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경험하면서 소설에 몰입하게 된다. ‘딸(1장)―큰아들(2장)―아버지·남편(3장)―어머니·아내(4장)―딸(에필로그)’로 이어지는 시점의 전환은 각자가 간직한 엄마에 대한 생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엄마의 헌신적인 가족 사랑과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았던 사태의 총체성을 인식하는 데 적격이다. 또한 시점의 분화는 절제된 감정을 유지하고 주관화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게도 매력 있는 글쓰기 방식이다.
신경숙은 최근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대중의 인기를 얻고 있다. 작년에도 신경숙은 역사소설 ‘리진’을 발표하면서 한국 소설사에 역량 있는 작가의 평을 받았다. ‘리진’이라는 인물을 통해 구한말 궁녀의 사랑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 독자를 사로잡았다. 소설의 영역도 19세기 프랑스의 세계까지 접근하면서 대가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번 소설 ‘엄마를 부탁해’도 신경숙의 진면목을 확인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여성의 섬세함이 조합된 문체와 내면을 모두 뱉어버리는 달변으로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칼로 도려내듯 펼쳐 보이고 있다. 엄마에 대한 사유는 여전히 깊고, 소설의 내용도 보다 현실적이고 친근해졌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저마다의 기억 속에 깊숙이 묻어둔 낡은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 엄마와 같은 이야기에 매혹되어 읽다보면 파편적인 우리 일상이 신기하게 감싸이는 느낌을 경험한다.
세상은 모성(母性)이 위대하다고 소리친다. 엄마는 세상과 견주어도 기울지 않는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늘 엄마를 소외의 그늘로 내몰았다. 우리 곁에 있어서 존재감마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는 독자가 많다. 읽으면서 우리가 소홀히 해 온 엄마의 세계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