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되돌아보면 아버지 세대에는 선생님이 학생들을 때리시고 화를 내시고 하셨다. 그 시절 부모님들은 현대 부모님들처럼 자식들 보호를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식들이 선생님께 맞을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만큼 사제간의 관계가 돈독 했었던 적은 그 시대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엔 교사들이 학생들을 체벌하는 일은 드물다. 법이 그렇게 하도록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학생들이 선생님과의 사이가 과거에 비하여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욱 더 멀어졌다고 본다. 단순히 문제를 해석해도 모순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어린왕자의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어른들은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떻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나비를 수집하는지? 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않는다. 하지만 나이가 몇이지? 아버지 수입은 얼마지? 체중은 얼마지? 형제는 몇이지? 하는 숫자로 된 물음을 좋아한다.’
필자가 이 글귀를 쓰는 이유는 요즘 학교의 상황을 말한 것이다.
학교는 뛰어난 학생을 모집하기 위해서 좋은 대학교를 많이 보내야 하고 그로 인해서 학부모들은 어느 학교가 좋은 곳을 몇 명을 갔는지 살펴본다. 그리고 좋은 대학교를 많이 간 학교가 명문고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명문고라는 소문의 학교에 학생을 보낸다.
결국은 이 시스템 속에서부터 선생님의 차별은 있다.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더 좋은 인센티브와 대우를 줄 것이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준다.
물론 학교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일 수도 있고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좋은 대학교를 가야만 인생이서 성공할 확률이 조금은 오를 수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낙오자가 많이 생긴다면 어떤가? 축구로 따지면 공격수만 잘하고 미드필더 수비수는 못하는 것, 아니 아예 없는 것이다.
학교는 본질적으로 학원이나 과외와는 차이가 있다. 쉽게 말해서 학교는 배움의 장이기도 하지만 학생이 성품이나 생활양식을 바로 잡아주고 앞으로의 사회생활을 이끌어준다. 학교에서의 배움은 그 많은 것들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학원은 학생들의 성적을 올려주는 의무밖에는 없다. 말한다면 정이라는 것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학교는 학원과는 다른 장점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만을 아끼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해주고 인간미 있는 선생님으로 계셨으면 하는 것이다. 사회적 차별을 학교에서는 만들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그런다면 지금의 각박한 사제간의 정도 과거의 돈독했던 관계로 다시금 탈바꿈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