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입학식 참석차 온 옛 제자를 보고 멀리서도 단번에 D여고 제자로구나 하고 알아차렸다. 교직37년 중 거의 대부분, 특히 두 군데 여고에서 줄곧 비담임이었던 나는 실장도, 미술부원도, 특정분야 유명인도 아닌 그녀가 금방 기억났다.
내가 자신을 기억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옛 제자에 대해 20년을 거슬러 하루 종일 옛날 일을 더듬었다. 하루 더 지나서야 단번에 떠올랐다. 단발머리 고1때 미술실 청소당번. 여럿 중 얌전하면서 인사성 있는 밝은 표정의 소녀였었다. 작은 섬도 아닌 대도시에서 그녀의 아들에 딸마저 2년 간격으로 다른 학교에서 연이어 만나게 되다니 4식구 중 남편 외 3명이 모두 제자인 특별한 사례인 것이다.
아들을 가르칠 때는 평범한 미술실기력 밖에 안 된 그에게 누구보다 신경을 썼고, 학년이 달라 딸에게는 직접 수업하진 못했지만 만화 애니메이션에 특별한 재주가 있는 학생이라 수시로 불러 자극을 주고 도운 결과 전국공모전에서 대상을 받기도 했다. 학교를 옮겨서도 실기대회 소식을 알려주거나 영재교육원 입학을 추천하고 상급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기까지 관심을 가지며 계속 연락을 유지한 것은 사제간 남다른 인연이 아닌가 싶다.
2003년쯤 부터 우리가족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떨어져 있는 가족간 대화의 광장 노릇을 한다. 이곳에는 통합게시판과 각각의 게시판, 가족앨범이 있고 작품갤러리에는 학창시절 작품부터 파일로 올려놓고 미술감상 수업에 수시로 활용할 수 있었다. 홈페이지를 수업에 활용한 과정이나 열람한 기록의 제시가 나의 수업발표대회, 교실수업 개선실천사례 연구발표대회에 두차례 입상하는데 조금은 보탬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학교 정보담당자의 협조로 학교홈페이지에서도 바로 우리가족홈페이지가 연결되도록 했더니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의 조회가 이어졌고 질문이나 댓글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옛 제자의 반가운 연락도 있었다. 인생의 교훈을 주는 고사성어들을 꾸준히 찾아 나름대로 수정과 보충, 편집을 거쳐 싣기도 했는데 네티즌들의 조회가 더욱 늘고 여러 해가 지나 홈페이지가 소문이 났는지 성인용 상업광고가 끼어들어 종종 삭제해야 하는 괴로움을 당하기도 했다. 또한 학생들의 전시회작품들도 후배들이 언제든지 찾아볼 수 있도록 액자를 하나하나 열어 교육정보실에서 작품촬영을 한 다음 학반 성명을 명시해 홈페이지 학생마당에 올렸더니 참 알차고 멋있는 교육자료로서의 가치를 발휘했다. 정보화교육시범학교 지정에 따른 컴퓨터 연수, 과목별 문제은행식 출제문항 입력업무도 몇 개월동안 이어졌었다.
학교선배에 대한 옛 추억 하나. 중학교 때 한두 번 미술실에 찾아오셨기에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알았던 선배님께 미대진학안내에 목마르던 나는 서울대학 재학 중이란 정보만 믿고 덮어놓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편지했던 적이 있다.
갑작스레 연필로 두서없이 보낸 서신이 전달될까 반신반의하였던 내게 노란 봉투에 내 이름 아래 ‘卽見’이란 우아한 흘림체 글씨를 처음 대한 나는 오묘한 교양인의 체취를 맡을 수 있었다. 편지에는 줄이 곧게 정성껏 써내려간 생소한 과목명, 이수시간 외에도 상세한 교육과정, 학교시설이나 실기수업내용들을 날렵한 필치로 낱낱이 안내해 주셨다. 하지만 그 후 내 진로가 취업과 독학-군입대-농촌의 교직생활이란 남다른 길로 전개되어 연락은 이어지지 못했다. 그 분은 1960년대 중·고등학교 선배인데 한편 우리를 가르치시던 중학교 은사이신 전선택 선생님을 통해 들은 선배님 안부는 외국에서 교환교수로 활동한다는 것. 그 뒤 과로로 쓰러져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마저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은사님께서는 지금도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신다.
2000년대 초 우연히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바로 그 선배님의 유작전시회 소식을 들었다. 모든 미술전시회는 항상 살아있는 미술교육 현장이라 수시로 들리는 장소이지만 그 분의 작품과 학창시절 이후 한남대학에 이은 독일에서의 교환교수 시절 활동, 외국작가나 학계와의 폭넓은 교류와 연구생활, 구상과 비구상 추상의 영역을 넘나들며 추구해 간 다양한 작품을 비롯해 가족과의 애틋한 안부교환의 흔적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는데 특히 일기와 가족과의 편지들에서 그 분이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였으며 작품제작과 교육연구활동에서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사셨는지, 또 자신의 제자들에게는 일일이 내게 친절히 대했듯이 자상하고 유익한 상담과 알뜰한 지도의 단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30년도 더 전에 받은 내 편지에 대한 답장이 말할 수 없이 사무치게 고맙고 감명깊었던 기억, 이제 여러 해 전에 그것도 한창 일하시던 47세 되던 해에 고인이 되신 그 분께 난 아무 것도 해드릴 수 없었다는 사실, 그저 멍한 가슴을 안고서 다만 200p 분량의 '김수평과 그의 예술'(김신자, 1995, 예맥출판사) 화집 한 권을 구입해 허전한 심정으로 전시장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열성적으로 활동하시다가 뜻밖에 가신 선배님! 늦게나마 고인의 명복을 비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