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나이에 들면서 몸이 예전 같지 않다. 늘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고 믿었는데, 몸이 점점 달라진다. 슬프고 안타깝지만 세월에 순응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다독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손 놓고 있는 것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 의학이 발달해서 나이를 뛰어넘는 치료가 가능하다고 하니 기대보기로 했다. 해서 병원에서 여러 가지를 검사했다. 생전 안 해보던 MRI 촬영까지 했다.
검사 후 결과가 나오는 날 병원에 갔다. 갈 때 마음이 안정되질 않았다. 말 그대로 기대 반 두려움 반이었다. 혹시 나에게도 어떤 병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지금까지 건강했던 것처럼 건강할 것이라고 암시를 주었다.
병원 방문 결과는 예상대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몸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스트레스와 과로가 원인이 되는 것이니 주의를 하란다. 이상이 없다는 말에 안심이 되었다. 아내도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병원 문을 나서면서 마음속에서 뒤틀림이 올라온다. 거액(?)을 내고 사진 촬영을 했는데 보고서가 온통 영문 표기로 되어 있다.
Brain MRI with MRA(Limited) :
No significant abnormal signal intensity or focal lesion in brain parenchyma.
Both basal ganglia and thalamus are normal appearance.
Ventricular system shows normal size an contour.
Brain stem and posterior fossa are intact.
No abnormal extraaxial or leptomeningeal lesion.
No significant abnormal vasculature or stenosis on TOF-MRA.
Conc) No significant abnormality
위 글은 의사가 작성한 소견서이다. 영어 사전을 펴고 해석한 결과는 특별한 증상을 발견하지 못했고, 이상이 없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주는 보고서를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왜 이렇게 영어로 썼을까? 특별히 전문적인 내용도 아니고 우리말로 써도 될 내용을 영어로 쓴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넉넉히 생각을 해보아도 처방전을 영어로 쓰는 이유는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애초에 그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자기 과시에 지니지 않는다. 영어를 쓰면 더 멋져 보인다는 문화 사대주의적 발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의료 행위로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의사들의 저급한 행동이다.
의료법 시행 규칙에도 보면, 진료기록부 등에 주된 증상, 진단 결과 등은 한글과 한자로 기재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법이 아니라도 이는 반드시 한글로 기록해서 환자가 쉽게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 의학의 기원이 서양에서 왔고, 오랫동안 영어로 공부를 했으니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의학이 서양에서 왔다고 해도 아주 오래 전 일이다. 이제는 의학도 우리 학문으로 정착을 했다. 아울러 의사들이 영어로 공부를 했어도, 환자를 위한 서비스는 당연히 우리말로 해야 한다.
의사들의 영어 처방전은 언제까지 참고 지켜봐야 하는 것일까. 의사들이 처방전 등에 영어 사용을 고집하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린 처사이다. 의사의 영어 처방전에 대한 진지한 자기반성이 필요할 때다. 이 문제는 의사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여론 수렴이나 공청회 등을 거쳐 국가 차원의 제재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