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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못 늙어서 미안해!

“선생님, 김영화 선생님이시지요. 선생님 혹시 첫 발령을 전남 고흥으로 받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예? 전남 고흥이라구요? 글쎄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고흥 흥양이라는 곳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맞아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첫 발령을 받아 오셔서 2학년을 맡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 그 때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을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쓰고,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선생님 꼭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저 이봉룡이라고 합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응? 이봉룡이라고? 아 봉서 마을 중간쯤에 살던 봉룡이란 말이지?”

“네, 선생님 저의 집이 있던 곳까지 기억하시고 계시네요. 건강하신지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혀 낯익지 않은 전화 속의 목소리는 지난날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아직 새파란 초년 시절의 초임지 모습을 눈앞에 그리면서 반가움에 목소리까지 들떠 있었습니다.

“그래 반갑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니?”

“네, 저도 지금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도 교직에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의 소식을 듣게 되어 이렇게 전화로 확인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내 거처를 알게 되었지?”

“네, 제가 국문학을 전공하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대학 쪽으로 갈까하고 여기 저기 찾아 다니다가 전남 순천대학에 원서를 넣었는데, 그곳에서 저를 귀여워 해주시던 교수님이 바로 선생님과 동창이시라는 것을 알고 여쭤 보았더니, 남달리 가까이 지내시던 관계라면서 전화번호를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만나 뵙고 올라오는 길에 이렇게 전화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전화를 받은 지 일주일쯤 지나서 이봉룡은 선생님을 찾아뵙고 함께 식사도 하면서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어린 시절에 함께 공부하였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벌써 잊혀져 가는 친구들의 기억을 찾으려 애를 쓰는 모습이었습니다. 선생님도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차례차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신체적 특징이라거나, 기억에 남는 행동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선생님 지금도 그 아이들을 기억하시고 계십니까? 저도 잘 모르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아직까지 그리도 생생하게 기억하실 수 있으셨어요.”

이봉룡 박사는 자기 친구들을 거의 기억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이상하게만 생각이 되었습니다. 자신도 교직에 몸담고 있기 때문에 많은 제자들이 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는 제자는 몇 명이 되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두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겨우 헤어지기로 하였습니다.

“저희들 여기 서울에 와 있는 친구들이 약 30여명이나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끼리 모임도 갖고 있으며 3개월에 한 번씩은 만나고 있습니다. 다음 번에는 꼭 선생님도 참석하여 주십시오. 저희들도 지난 날의 이야기도 듣고 또 선생님을 모시고 친구들이 한 번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헤어지면서 이런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래? 한 번 만나 보았으면 좋겠구나. 내가 너희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모르고 젊음 하나로 너무 엄하게만 하였던 기억 밖에 없으니 만나면 사과를 해야겠다.”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남기시며 헤어져 가셨습니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이런 자리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고, 정말 아이들을 만나기까지는 믿어지지 않아 긴가민가하였던 일이었습니다.

이미 35년 전, 아직 끼니 걱정을 하던 그 어려운 시절에 교사라는 직장을 찾아 산 설고 물 설은 고장이지만 발령장을 받고 달려가는 마음은 한없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때만 하여도 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까지 공부하지 않고 사범학교라는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교사로 발령이 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내가 이 사범학교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막내둥이이었으니까 이미 각 도 별로 한 군데씩 교육대학이 서고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나이 21살에 교사 발령을 받은 나는 집에서부터 약 50여㎞ 떨어져 있는 이웃 군으로 발령이 나서 그 곳에서 자취 생활을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 땐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자동차가 많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웃 군이라도 통근을 한다거나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고, 농촌이어서 도시에서처럼 하숙을 하거나 가정교사라도 할 수 있는 그런 형편도 되지 못했습니다.

잔뜩 기대를 걸고 첫 발령장을 가지고 찾아간 학교의 모습은 참담하기만 하였습니다.

“이 학교는 금년 3월 1일 자로 새로이 개교한 분교로 교실이 모자라서 7학급이 교실 4칸에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4학년을 제외한 나머지 학년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1, 2 학년 모두 반을 나누지 못하고 혼자서 2반 학생을 한데 모아 맡고 있었는데 선생님들이 오셨으니 반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분교장이시라는 60대 선배 선생님께서 일러주신 말씀이었습니다.

학교라고 해야 아직도 논바닥의 벼 포기가 그대로 보이는 운동장과 교실 네 칸, 그리고 교실 앞에 달랑 서 있는 국기 게양대 하나, 운동장 구석에 땅을 파서 엉성하게 외를 엮어서 벽으로 가린 화장실 두 칸이 전부였습니다. 화장실 문은 묶지 않은 가마때기를 매어뒀을 뿐이어서 400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쓸 수 있는 시설이라기에는 너무 허술한 것이었습니다. 울타리도 화단도 없는 허허 벌판에 서있는 달랑 교실 4칸. 이것이 그 아이들과 학교 생활을 시작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실이 없는 오전 동안에 일찍 학교에 온 아이들을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나뭇그늘을 찾아다니면서 노래를 불렀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비좁은 복도에서 3개 반이 우글거리는 속에서 공부를 한다고 야단을 하는 웃지 못할 형편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학교시설을 좀 고치려고 하면 당시에는 교육청에서 도와주거나 돈을 대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의 인력을 동원하고 도움을 받아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웃한 두 마을이 학교 설립 부지 관계로 감정적으로 대립하고 있어서 전혀 협조가 이루어지지도 않은 상태라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무엇이나 하려고만 하면 서로 저쪽 마을에서 해주라고 하라는 식으로 미루고 말았습니다. 저쪽 마을에서 협조를 안 하는데 우리만 자식 가르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떠넘겼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공부했던 그 아이들이 선생님을 찾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미 35년이 지난 그 옛날의 선생님을 6학년 담임도 아닌 2학년 때의 담임을 찾는다는 것부터가 흔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으로서는 뜻밖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오늘은 모두 모인다는 것입니다. 35년만의 만남 과연 어떤 모습들을 하고 있을까? 선생님도 잔뜩 기대가 되는 이 모임에 설레는 마음으로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야 오랜만이다. 그 동안 왜 그렇게 만나는 자리를 만들지 않았지? 만나면 이렇게 좋은데 말야.”

“그래 사업은 잘 되어 가냐 ? 사업이 어렵다고는 하지만 너는 잘 되지?”

“참 오랜만에 만나니 너희들 얼굴도 잘 모르겠다. 이거 너무 오랜만이 아니니?”

아이들은 제각기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오늘 여기 귀한 손님을 모셨다. 너희들 기억할는지 모르겠는데, 여기 계시는 분은 우리가 2학년 때 우리를 가르쳐 주셨던 김영화 선생님이시다. 처음 발령이 나셔서 얼마나 우리를 열심히 가르쳐 주셨는지 기억나지?”

“와아 선생님! 반갑습니다.”

한바탕 인사가 있고 나자 아이들은 선생님을 가운데 모시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모두들 '저는 누구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고 선생님은 지난날을 생각하면서 그 옛날의 기억을 살려 불러 주기도 하고 기억이 잘 안 나는 아이들에게는 묻기도 하면서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잠시 후 늦게서야 도착하는 한 남자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잠시 수런거리더니 이 박사의 지시대로 '쉿!' 소리를 내면서 입에 검지를 세워대는 동작으로 행동을 통일하였습니다.

“야! 내가 너무 늦었지? 날씨가 너무 더워서 말이야”하면서 가까이 다가오자 아이들은 앉은 채로 하나씩 악수를 나누면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던 그 아이는 선생님의 앞에 이르러서 손을 덥썩 잡으면서 “야 ! 너는 누구냐 ? 하두 오랜만에 만나서 누군지 잘 모르겠다.”

이 말은 자리에 앉은 모든 아이들에게 폭탄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배꼽을 잡고 뒹굴기도 하고, 여자아이들은 입을 가리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어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습니다. 말을 걸었던 아이는 그만 어이가 없어서 자리를 휘둘러보면서 “왜 그래에? 내가 뭐 잘 못 했냐?” 이 소리는 더욱 모든 사람들의 웃음을 부채질을 했습니다.



갖가지 웃음소리가 골짜기를 울리고 퍼져 갔습니다. 이쯤에서 이봉룡 박사가 정색을 하면서

“야 ! 너 얼른 꿇어 엎드려서 인사드려 임마! 너 누구신지 모르겠어?”

“뭐 ? 누구신데?”

“야, 임마. 우리 2학년 때 담임선생님 김영화 선생님이셔. 얼른 인사드려. 너 그럴 줄 알고 일부러 안 알려 준거야.”

“아이고 선생님 죄송합니다. 하두 오랜만이라 몰라 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아이는 정말 죄송해서 못 배기겠다는 듯 얼굴이 빨갛게 되어 가지고 꿇어앉아서 큰절을 올렸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인사가 끝난 아이는 선생님의 손을 다시 한번 잡으면서 “선생님 정말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하고 다시 한 번 사죄를 하고서는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야, 이 자식들아. 나를 이렇게 창피를 주려고 작당을 해 못된 녀석들 같으니라구” 한바탕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야, 술병 이리 내. 내가 선생님께 사죄 술을 한 잔 올릴란다.”하고 술병을 들어 권하고서는 천천히 선생님을 바라보면서 “선생님 찬찬히 보니까 이제야 기억이 나는데요. 선생님 그런데 흰머리는 제가 더 많은 데요?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도 안 변하셨어요”하며 진심으로 선생님께 인사를 다시 드렸습니다. 

“우리가 35년 만에 다시 만났지? 그 동안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너희들도 이제는 늙어 가고 있구나. 이렇게 다들 건강하고 자기 몫을 다해주니 정말 고맙다. 아직 이것밖에 늙지 못해서 미안하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늙지 않으시는 비결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환한 웃음 속에서 긴 여름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산골짜기를 타고 흘러 내리는 골바람이 시원하게 더위를 식혀주고 지나갑니다. 35년이란 세월을 한 순간인 것처럼 모두 잊게 해준 이 자리가 아스라니 기울어 가는 햇발처럼 머릿속을 맴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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