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오일쇼크 이후 선진 국가들이 경제정책 협력을 위해 G5(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를 구성하였으며, 곧이어 이탈리아(1975), 캐나다(1976)가 포함하여 G7으로 유지되었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시장 안정 및 전 세계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국제협력체제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99년 주요 선진국 및 신흥국의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가 모여 국제사회의 경제, 금융 이슈를 폭넓게 논의하는 'G20 재무장관회의'가 출범되었다.
G20 재무장관회의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선진국과 신흥국들간 긴밀한 정책공조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장관급 회의'로 운영되던 G20 회의가 '정상급 회의'로 격상된 회의가 지난 11.11일부터 이틀간 서울에서 향후 세계경제를 좌우할 주요 4대의제인 환율, 글로벌 금융안전망, 국제금융기구 개혁, 개발을 우리주도로 조정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동안 국민들은 사소한 생활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세게 정상들에게 한강의 기적을 유감없어 보여 주었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2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가로 일어선 나라는 147개 국가가 된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한국은 금융위기가 왔을 때 온 국민들이 장롱 속에 금붙이를 팔아 나라 경제를 살리는 저력으로 가장 짧은 기간에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한국만이 1인당 국민소득 20.000만 달러를 넘는 경제 세계13위권, 수출 10위권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지난 50여년간 우리 국민들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는 세계사에 영원히 기록 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해방 후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도 한국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분들의 업적을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그분들 중에서도 이미 고인이 된 박정희 대통령과 현재 생존에 계신 현 한국산업개발연구원장 대한민국 경제학 1호 박사 백영훈원장의 업적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의 경제발전을 위해 선진국에 경제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 때 마다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우방국인 미국 대통령마저도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국가와는 상대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20세 후반 백 박사를 앞세워 독일에 파견시켜 3천만달러 경제지원을 받아냈지만 은행으로부터 지급보증을 받지 못해 1개월이상 독일에 머무면서 지도교수와 친구들의 도움으로 독일정부 지도자들과 심도 있는 보증방법을 찾아내는데 성공시켰다. 당시 독일은 석탄을 캐내는 광부(3.000명)와 병원에 근무할 간호원(2.000명)이 부족함을 알고, 우리나라 근로자들을 파견시켜 그들의 임금 3년치를 담보로 해서 3천만달러를 지원받았다. 보리 고개에서 허덕이던 우리 국민들은 외화벌이에 수십만명이 독일파견에 희망했다고 한다.
선발된 광부와 간호원들은 수송기 1대에 150명씩 탑승시킨 여객기는 독일로 향했고, 그때마다 부모형제들은 공항에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하게 생활하다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수일 동안 공항은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백 박사는 그때의 일을 생각할 때 마다 가슴이 뿌듯했다고 한다. 장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광부와 간호원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광부들은 40도 이상 오르내리는 열악한 지하 갱도에서 팬티만 입고 뼈를 깎는아품을 참으며 주야로 석탄캐는 일에 열심히 하였고, 간호원들은 죽은 시체를 깨끗이 닦아주는 일을 비롯하여 환자 목욕시키기 등 구역질나는 일들을 도맡아하며 독일 국민들에게 봉사했다고 한다.
그 때 독일 국민들은 독일경제와 국민들의 삶의 향상에 도움을 준 우리 광부와 간호원들에게 감사함을 느끼고 있을 때 백박사와 대통령이 근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독일을 방문 했을 때 공항에서부터 시내까지 독일국민들로부터 대한민국 태극기를 흔들며 귀빈대접을 받았고 한다. 백 박사는 지원받은 3천만달러를 밑천으로 경제를 발전시킬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30여명의 국내 세일즈맨과 세계 유명 백화점을 찾았다. 가는 곳 마다 화려한 상품들이 진열된 점포를 보는데 유독 가발을 파는 점포와 인형을 파는 점포를 비롯하여 조화를 파는 점포 앞에 사람들이 물건을 사기 위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보았다.
국내에 돌아와 정부에 건의하여 구로공단에 가발공장을 세우고, 원자재인 머리카락 확보를 위해 당시 전국에 단발령을 내려 부모 자식간에 속여가며 머리카락을 몰래 잘라 모아 60만 달러의 가발을 만들어 수출했다. 또 공업용 미싱 산업을 육성시켜 4백만 달러의 인형을 만들어 수출했고, 뒤 이어 인조 조화를 만들어 3백만 달러를 수출한 것들이 초석이 되어 드디어 1965년 10월30일에 우리 역사상 최초 1억 달러의 수출의 금자탑을 세웠으며, 1977년에는 1인당국민소득 100억달러를 달성시켰다.
이렇게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가진 박정희 대통령은 백 박사에게 경제발전 연구소를 설립시켜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했고, 경부고속도로를 비롯하여 각종산업단지 조성 인프라 구축으로 오늘날 우리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선진국 대열에 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와 미래 역사학자들은 과거에는 미국이 세계의 경제를 이끌어왔다면 21세기에는 이머징국가(신흥산업국가)들이 주도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아시아 대륙인데 중국도 일본도 아닌 한국이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타 민족과 달리 한국인은 종교의 뒷받침이 잘되어 있고, 사회적인 도덕심이 강하며, 조수미나 김연아 같이 세계를 놀라게 한 밑바탕은 문화의 독창성(혼)이 뛰어났다고 한다
또 한국인의 저력은 문화의 독창성, 충효사상, 높은 교육열, 젊은이들의 조직력이라고 하는데 그 저력을 살펴보면, 먼저 명절 때만 되면 천리 길을 마다하고 2천만명 이상의 국민들이 고향방문을 위해 길거리로 나오는 한풀이 문화와 온 국민이 좀 더 살기위해 전개한 새마을 운동을 일으킨 신바람 문화는 한국인의 저력이기도 하며, 그 다음으로 부모들이 보여준 효 사상으로 가족들을 위한 화합, 포용력, 희생정신과 높은 교육열을 꼽았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일찌기 창의성 교육을 국가 동력산업으로 육성하는 교육정책 패러다임의 변화가 빨랐으며, 부모들은 다른 나라 국민들에 비해 자식교육을 위해 남다른 열정으로 가정경제의 33.5%의 높은 교육비 지출과 세계 각국에 60만명 내외의 자녀들을 유학시키고 있지 않는가?
끝으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무기는 젊은이들의 애국심과 조직력이라고 할 수 있다. 2002 FIFA 한일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들이 펼친 거리 응원전의 열기는 세계인을 다시한번 놀라게한 일들로 우리 젊은이들만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애국심이의 표상이다. 이와 같이 국가발전과 애국심의 사례들을 재조명하여 한국인 저력을 길이 승화시키는 국민교육 자료로 활용한다면 우리경제 한층 더 레벨업(level-up)되어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 강국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