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 향기가 현기증을 일으키게 한다. 오월은 행사가 참 많은 달이다. 그 중 스승의 날에 제일 기억에 남는 아이들과의 있었던 일화를 떠올려 본다.
육 년 전 이월. 그해 겨울은 눈으로 인색한 남해에 세 번씩이나 눈이 내리고 늦겨울 한파가 매서웠던 때였다. 봄방학을 하는 날 초등학교 오 년 동안 담임한 아이 중 여학생 두 녀석이 찾아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한다며 사복차림으로 찾아왔다. 반갑게 맞이했지만 추운 날씨 탓에 볼은 빨갛고 고개를 떨어뜨린 채 손전화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마침 점심때여서 약속 때문에 자장면을 사주고 교실 문을 나서는 순간 자꾸 뒤가 돌아 보였다.
저녁에 아내에게 낮의 일을 말하니 “사람이 인정없이 왜 그랬어요! 추운데 좀 더 따뜻하게 국물 있는 것이라도 먹여야지 자장면이 뭐예요. 참 그래도 대단하네요. 어쩌면 멀어질 때도 되었는데 찾아온다니 그래 오 년을 담임하기가 보통 인연이 아니지요. 아마 그 아이들은 당신 눈빛만 봐도 속내를 다 알 것이네요.” 한다. 그 아이들과의 인연과 흔적은 참 많다. 읍내학교 근무를 마치고 부임한 곳은 폐교를 앞둔 바닷가의 작은 학교였다. 그리고 맡은 반은 열 명 남짓으로 2,5학년의 복식학급이었다.
화창한 봄날 토요일 퇴근시간. 도로 한복판에서 기어가는 뱀을 진섭이란 녀석이 꼬챙이로 잡아들고 “선생님 이 뱀 이름이 뭐예요?”한다. 옆에 있던 여선생님들은 놀라 뒤로 물러나는데“잘 모르겠다. 교장선생님은 물어보면 아실까?”하자 진섭이를 선두로 다른 한 무리 아이들이 교장실로 달려간다. 그리고 잠시 후 벌어진 소동은 난감하게 만들었다. 교장실 문을 열었을 때 얼빠진 뱀이 바동거려 기어다니는 바람에 난장판 직전이었다. 더욱 난감한 일은 우리 선생님께서 여쭈어 보라 하여서 들고 왔다는 순수의 대답이었다.
그 기억을 뒤로 학교는 폐교되었고 다시 본교에서 육 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이제 그 아이들은 통학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게 되었다. 진한 국화향과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 통학버스가 들어오고 첫 시간 수업이 지나도 두 녀석이 오지 않아 연락하니 학교 선생님들 체육대회 한다고 안가도 된다며 놀러 나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자 아이들을 다음 버스로 보낼 테니 다리 몽댕이를 분질러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후 아니나 다를까 녀석들은 고양이 앞에 쥐 마냥 풀이 죽어 고개를 떨어뜨린 채 들어왔다. 너희 이제 죽었다 하는 소리가 교실 이곳저곳에서 나왔다. 두 녀석을 빈 교실로 데리고 가자 지레 눈물을 흘렸다. 창윤이 말인즉 진섭이가 숙제를 안 했으니 가지 말자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진실을 말했으니 용서한다 하니 금방 얼굴에 햇살이 퍼졌다. 그 사건 이후 진섭이는 다소곳 해졌지만 읍내학원에 다니면서 다른 학교 아이들과 주먹질도 하며 얼굴에 멍이 들어 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예의바르고 의리는 참 강했던 아이였다. 그리고 졸업과 함께 중학교로 진학하고 나도 아이들도 읍내로 왔다.
면 단위 학교에서 중학교에 다니면서 남학생들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여학생들은 시간이 있을 때면 찾아왔다. 간혹 무섭고 엄한 선생님이 뭐가 좋냐고 물어보면 선생님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해주셨다고 하였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그 이듬해 스승의 날 오후였다.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들고 교실로 왔다. 반가웠지만 내심 무슨 돈이 있다고 나무랐다. 아직은 아니야 너희들 마음으로 충분하니깐 다음부턴 이런 일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시원한 냉면을 먹여 보냈다.
때로는 타이르고 때로는 야단치고 부대끼며 사는 일이 교사란 직업이다. 오 년이란 시간 그 아이들하고의 일들은 미운정 고운정으로 물들어졌다.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스승의 날이다. 그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다. 이번 오월에도 올지 모르지만, 교직 생활에서 이 아이들과의 인연은 정말 기억에 남을 일이다. 마치 진하게 풍기는 아카시아향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