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된 핀란드 유바스큘라 대학의 박사 학위 논문(2012. 7.3. 한국교육개발원 해외교육 동향)에서는 학습 부진아의 주요 원인으로 교사와의 관계 혹은 의사 소통 과정에서 부정적 경험을 꼽고 있어서 눈길을 끕니다. 이 논문에서는 학생이 교사와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경험을 할 경우 학생의 공부에 대한 의욕을 저하시키며 수치심, 두려움 등의 부정적 감정을 일으킨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학생이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방치될 경우 학습 부진아가 될 위험이 크다고 결론 짓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선생님이 가르치는 방법과 의사소통을 포함한 관계 형성의 기술이 부족하여 학생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공부상처를 남겼거나, 그 상처를 치유할 도움조차 주지 않아서 학습 부진아를 양산한다는 두려운 질책이 담긴 보고서입니다.
그 보고서를 접한 순간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봅니다. 나때문에, 내 잘못때문에 학습부진아가 된 제자가 없었는지 깊은 숨 몰아쉬며 되돌아봅니다. 완벽한 사람이 없듯, 완벽한 선생님도 없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면 간단히 빠져 나올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한 사람들의 입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자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는 아름다운 사례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선생님의 희망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상처 어루만지는 선생님이 되어야
학자에 따라서는 '학습부진'이라는 용어 자체를 쓰지 말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 용어 자체가 낙인을 찍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대신 '노력형 학습자'(진보교육자들)라고 하거나 '천천히 배우는 아이' 와 같이 언어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공부를 포기하고 싫어하는 아이'라는 말 대신, '열심히 하는데 성취가 나오지 않는 아이' '능력은 있는데 성취를 못하는 아이'로 보는 시각만 바꾸어도 좀 더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 온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학교 폭력'이나 '왕따' '집단따돌림'과 같은 용어도 좀더 언어 폭력적이지 않은 단어로 바꾸어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1%만 바꾸어도 결과는 100% 달라질 수 있는 것이 교육의 가소성임을 생각한다면!
어찌 보면 학교의 선생님들은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이 되었기에 공부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공부상처를 지닌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병상련'의 아픔이 있을 때, 그 사람과 똑같은 상황을 직접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상대방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해한다'라는 표현은 결코 함부로 쓸 수 없는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체험이 아닌, 보거나 들은 경험만으로는 머리로는 이해하나 가슴으로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를 주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건에 대하여 인터넷 상에서 악플을 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그처럼 사람을 죽이는 엄청나고 무책임한 댓글을 단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은 아픔을 겪은 사람은 결코 남의 아픔에 함부로 말하지 못합니다. 아무런 연민을 느끼지 못하기에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서 난도질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상처를 준 것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말하거나 글을 쓰게 하는 일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수시로. 선생님은 위한다고 했지만 역으로 상처를 받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않고서는, 의사소통으로 관계를 개선시키지 않고서는, 지금과 같이 잘하는 아이 중심, 서열을 매기는 학력사회에서는 대다수가 공부상처를 받는 악순환이 계속될 것입니다.
더구나 공부의 의미가 우리나라처럼 지필평가 성적, 종이위에 나타난 숫자 중심의 학력사회에서는 불리한 아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굳이 다중지능 이론을 펼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운동기능은 최고인데 수학은 싫어하는 아이라면 타고난 씨앗이 다름을 인정해주지 않는 평가체제로 12년 동안 공교육의 틀에서 받는 아이들의 상처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옵니다. 학습부진아가 아니라 그 아이가 가진 씨앗의 종류조차 진단하지 못한 채 엉터리 주사만 놓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바쁜 업무와 다인수 학급, 변화의 속도가 빠른 세상에서 선생님 노릇을 한다는 것은 뚜렷한 소명의식이 전제되어야 하고 부단히 공부하고 새로운 교육철학을 섭렵하며 학생들보다 더 공부하지 않으면 앞서가는 아이들의 그림자만 밟으며 헤매게 됩니다. 최근에 불거지는 교단의 문제도 소통의 부재라는 진단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이제는 교사자격증만으로, 임용고사 합격만으로 교실에 제대로 설 수 없는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교실에 설 수 있다는 첫 단추입니다. 두번 째 단추부터는 스스로 찾아가며 맡은 학생들의 개개인에 맞춘 자신만의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어디를 가나 연수 열기가 높고 다양한 교육연구소나 동아리 활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한 것을 보면 매우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제자들의 변화하는 모습, 기록해 봐요, 의사처럼
앞서가는 핀란드의 교육 논문이 보여준 실태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봅니다. 만약 같은 주제로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조사를 한다면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받는 상처의 사례는 공개하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곪아 터진 상처를 그대로 두고 덮는 수술로는 환자를 낫게 할 수 없음을 생각한다면, 이제라도 오늘 내가 우리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격려를 했는지 기록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끼는 후배 선생님들에게 늘 교단일기를 쓰라고 조언합니다. 그것은 자기 반성이자 제자들에게 대한 최소한의 의무라고 말입니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한 기록을 장기 보관하는 것처럼. 제자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긍정적인 대화를 단 한 줄의 문장만이라도 기록하여 종업식날 개인별로 나눠준다면 힘들 때마다 들여다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를 진정으로 염려해 주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먼 길 가는 동안 힘이 된답니다.
날만 새면 소중한 아이들이 삶을 포기하고 서로 물고 뜯으며 상채기를 내는 소식이 가슴 아픕니다. 상처 받은 아이들이 그 스트레스를 다시 서로에게 돌리며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보여준 것입니다. 아이들 탓을 해서는 결코 고칠 수 없습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은 아이들까지 감안한다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실감조차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살아남아도 일할 곳이 없는 젊은이들의 아픔과 좌절까지 생각하면 그야말로 국가적인 긴급대책반이 꾸려져야 합니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인생임을 알게 하는 교육, 비교와 경쟁이 아닌 진정한 공부를 위한 삶을 배우게 하는 고민을 할 때입니다. 모든 부모와 선생님, 그리고 온 사회와 특히 세상을 이끌어가는 리더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