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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선생님을 존경한 멋진 아버지

가방에 집착하는 여자

나는 가방을 참 좋아한다. 그렇다고 비싼 명품에 집착하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세상 일에 미련이 많아서일까? 저장 본능 같은 것이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어서 그런 걸까. 단골 마트에서 물건을 일정 금액 이상으로 구입하면 가방을 보너스로 얹어주는 행사를 할 때면, 몇 번을 망설이다 기어히 사고 마는 집착을 보인다. 물건 자체보다도 가방에 마음이 끌려서 충동 구매를 하는 편이니 고쳐야 할 태도이다. 그렇게 해서 받은 여행용 가방을 아들에게도 주고 딸아이에게도 주었다. 친구들 모임에 가거나 직장의 친목 모임에서 여행을 갈 때에도 가장 먼저 챙기는 물건이 가방이다.

제자의 주례 부탁을 받고 제일 먼저 준비한 것도 가방이었다. 심지어 딸아이가 색다른 손가방을 가지고 다니면 자꾸 예쁘다며 아이들처럼 귀찮게 하곤 한다. 그렇다고 쓰지 않고 둔 가방을 버리거나 쉽게 처분하지도 못한다. 그 가방에 얽힌 자잘한 이야깃거리까지 같이 버리는 것같아서이다. 가방에 대한 이런 집착은 어렸을 때 제대로 된 책가방을 가져보지 못한 탓이라고 스스로 진단을 내렸다. 마치 모유를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가 손가락을 빨거나 특정한 물건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처럼 나도 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집의 파랑새, 새 어머니

가방에 대한 나의 이런 애착은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어머니의 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날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30년이 넘은 어머니의 작은 옷가방. 그것은 새어머니가 우리 아버지와 재혼하면서 가져오신 참 작은 가방이었다. 그 어머니는 3년 동안 홀아버지와 삶을 이어가던 우리 집에 찾아온 파랑새였다. 쉰을 넘긴 아버지가 일터에서 돌아오면 철없는 딸아이 대신에 따스한 저녁 밥을 지어놓고 아버지의 지친 어깨를 보듬어 준 여인이었으니 우리 집의 희망이었던 새어머니는 파랑새가 분명했다. 다만 어린 나에게는 그것이 늘 서럽고 불만이었지만 적어도 아버지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등불이었던 어머니.

그 어머니는 가로 세로 50센티미터에 깊이는 10센티미터 쯤 되는 연하늘색 작은 손가방 하나를 가지고 우리 집에 오셨다. 45년이나 지난 그 가방의 모양과 색깔, 심지어 지퍼의 위치까지 장기기억의 저장고에 정확하게 기억되어 있으니 놀라울 뿐이다. 그날은 칠월칠석이었는데 비가 참 많이 왔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 와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놀려댔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에 결혼을 한다면서. 나는 그날 샘통을 부리면서 방 아랫목에 누워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어른들의 농담을 들으며 괜히 슬퍼했다. 사람들이 나의 친엄마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어린 마음에 슬펐던 것이다.

나이 많고 가난하고 볼품 없는 남편을 사랑한 어머니

어머니는 그 손가방을 무척 소중히 하셨다. 내 손이 닿지 않을만큼 높은 시렁에 올려놓으셔서 그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몰랐다. 어머니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손가방을 갖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곤 했지만 어머니는 늘 높이 올려 놓고 구경조차 시켜주지 않으셨다. 가난한 아버지를 따라 두 번째 시집을 온 어머니. 내 어머니와 헤어지고 3년 동안 홀로 나를 기르시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동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만큼 금슬이 좋으셨다.

아버지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어머니는 아버지 마음 하나보고 사신다며 아버지의 얼굴때문에 싸우거나 탓하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랐다. 하얀 피부에 곱상한 얼굴을 가진 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뭐든지 잘 만드셨고 음식 솜씨도 일품이어서 얌전하다고 소문이 날 정도였다. 그렇게 솜씨가 좋으신 어머니는 나를 가르치는 데도 엄격하셨다. 그때 겨우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음식을 하실 때면 곁에 세워놓고 설명을 하시며 요리법을 가르치고 솜씨를 가르치셨던 어머니였다.

초등학교 3학년에게 살림 가르친 독한(?) 엄마

"옥순아, 아직 어린 너에게 일을 가르치고 음식 만드는 법까지 배우게 하는 엄마가 원망스러울지 모르지만 네가 커서 성공하여 다른 사람을 부릴 때에도 네가 알고 시키는 것과 모르고 시키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단다. 그리고 여자가 부지런해야 살림이 모이는 법이다. 밥태기 하나라도 구정물에 버리면 죄 받는다. 음식이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하는 것은 아주 나쁜 짓이지. 너희 아버지가 일터에서 얼마나 힘들게 일해서 벌어온 돈으로 사들인 쌀인데 한톨이라도 버리면 되겠냐? 자고로 여자는 엉덩이가 가벼워야 하는 법이다. 어디 가서 놀면서 해넘는 줄도 모르면 안 되지. 시집을 가더라도 시댁에 가면 제일 먼저 설거지통을 가까이 해야 한다."

열살 남짓한 어린 내가 알아 듣지도 못할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게 읊으시던 어머니의 신부 수업(?)은 그렇게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 어머니는 야박하리만큼 나에게 일을 가르치셨다. 설거지를 해놓으면 밥 그릇 둘레를 손가락으로 만져 보시며 행여나 덜 씻어졌나 확인하시곤 했다. 어머니 맘에 들 리가 없던 어린 소녀는 그런 엄마가 팥쥐엄마 같았고 나는 콩쥐라고 생각해서 늘 몰래 울고 다녔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듣던 잔소리를 내 딸아이에게 그대로 반복하는 내 모습이 튀어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웃곤 한다. 오히려 딸아이를 아낀다며 잔소리 대신 내가 다 해주는 바람에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하는 것같아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그 당시에는 시집올 때 혼수품목으로 재봉틀이 손꼽혔지만 가난한 신부였던 어머니는 재봉틀 대신 손으로 옷을 잘 지으셔서 옷도 잘 만들어 입으셨고 내 옷도 잘 지어주셨다. 바느질 솜씨와 요리 솜씨가 뛰어난 어머니는 얌전하셔서 살림 밖에 모르셨으니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그 어머니는 성질이 급하셔서 느려 터지고 고집도 센 나와 정반대라서 그게 문제였다. 그래도 어머니께 느리고 고집부린다고 매라도 맞으면 아버지가 돌아오시기 전에 눈물을 감추는 지혜로움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얻곤 했다. 내가 울고 있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부부싸움을 할 것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더러 영리한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런 걸 보면 미련퉁이는 아니라며 동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추켜 세워 주시곤 했다.

이제 생각하니 우리 부모님은 '미녀와 야수' 커플이었던 것같다. 마술이 풀리지 않고도 보이지 않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하며 가난하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쉰을 넘긴 한 남자를 극진하게 사랑한 어머니. 가난한 남편의 수입을 쪼개어 쓰던 어머니는 살림의 지혜가 빛났던 분이었다. 어쩌다 소고기 한 근을 사 오면 그것을 볶아서 시원하게 갈무리하여 일주일 동안 아버지의 조반상에 조금씩 국으로 끓여 내놓는 현명한 부인이었다. 아끼고 모으는 전형적인 아내의 모습을 내게 보여주셨던 어머니의 모습을 은연중에 나도 배우고 있었다.

외모로 보아서는 여자들의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아버지의 외모는 젊어서 병치레로 얼굴 중에서 외모를 결정짓는 잘 생긴코 모양이 정상인들과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미남이셨던 아버지가 젊어서 병을 얻어 코를 상하신 후 인생을 포기하려고까지 하실만큼 치명적이었다. 철없는 나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부형 총회 때 아버지 얼굴을 보고 친구들이 놀려대는 게 싫어서 늘 숨어버리곤 했었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엄마들이 학교에 나오는데 우리 집에서는 다른 집 아버지들보다 훨씬 나이 들고 코 모양까지 보통 사람들과 달랐던 아버지가 학교에 오시는 날은 복도 쪽을 내다보느라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던 철없는 딸이었다. 오직 친구들의 놀림이 부끄럽고 싫었던 초등 학생이었던 나에게 아버지의 자상함은 너무나 큰 것이었다.

선생님을 존경한 멋진 아버지의 교육 방법

학교에서 회의가 있거나 선생님의 가정방문이 있는 날은 일도 나가시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주신 아버지의 교육열은 박수를 받아 마땅했지만 나는 그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한 불효자식이었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신다고 하면 어머니에게 부탁하여 잉어튀김을 하여 술상을 차리게 하셨고 소풍을 가는 날에는 아버지가 즐겨 피우시던 아리랑 두 갑을 꼭 싸서 갖다드리라시던 아버지. 아버지가 가장 많이 고개를 숙이던 유일한 분은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어렸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우리 선생님인 줄 알았다.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아버지도 꼼짝 못하고 인사를 공손히 하는 분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교직이나 선생님을 우습게 보거나 자식들 앞에서까지 선생님을 험담하는 경우가 있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런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었다. 심지어 중학교를 시험을 쳐서 가던 그 시절에 아버지가 원하는 중학교에 원서를 내야 진학시킬 수가 있으니 도시로 원서를 내면 좋은 중학교에 합격이 되더라도 집안 형편상 학교를 보낼 수 없다며 발이 닳도록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설득을 하시면서도 내 앞에서 선생님을 원망하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 이제 생각하니 아버지는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 선생님을 그처럼 위하고 존경했던 것이리라.

결국 나는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도시 학교로 원서를 낸 선생님의 뜻대로 입학시험을 보았고 합격했으나 진학하지 못한 채 가방끈이 짧은 인생을 시작해야 했다.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시절에는 책가방이라기보다는 책보자기가 전부였다. 친구들의 멋진 빨간 책가방이 부러웠던 초등학교 시절, 그리고 멋진 교복을 입은 여중학생이었던 친구들이 가지고 다녔던 의젓한 책가방은 부러움을 넘어 집착으로 변질되었으니, 사춘기를 지나던 소녀의 가슴 속에는 '나도 배우고 싶다'는 간절함이 나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주경야독의 길을 찾아 서울 길을 떠날 때 어머니는 가장 아끼는 물건인 그 손가방을 선물로 주셨다. 어머니의 손때 묻은 손가방 속에는 책 몇 권과 성경, 속옷 한 벌이 전부였다. 어머니는 나를 집안을 일으키는 기둥으로 여기셨고 서울로 돈을 벌러 떠나는 나를 보내시며 하염없이 우셨던 1974년 5월 8일.

20개월 동안 식모살이를 하며 월급을 모아 세 식구가 살 전셋방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던 날, 나는 어머니의 손가방을 몇 배나 큰 가방 속에 담아서 귀향했다. 그 어머니가 가르치신 대로 주인 집의 살림을 잘 해냈고 알뜰히 모은 월급으로 강의록을 사서 독학하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젊은 날의 내 가슴 속에는 늘 어머니의 손가방과 내가 갖고 싶었던 책가방이 있었다.

젊어서 고생한 덕분에 잘 이겨낸 세월

비록 친구들처럼 당당하게 정규중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주경야독의 길로 돌아와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 그렇게 공부한 결과 공무원 시험을 합격하였고 한 발 더 나아가 통신대학 학사 과정을 마치고 교사 자격증을 획득하였으며 순위고사를 치르고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까지 얻었다. 교단에서 내려서는 그날부터는 가장 좋아하는 분야의 박사 학위에 도전할 생각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배우는 자로 살고 싶다.  나는 아직도 책가방을 소중히 하며 살아가고 있다. 퇴근 후에는 도서관에 들러 독서 활동을 하곤 한다. 서점에다 주문해 둔 새 책을 책가방에 넣고 다니며 어린 시절 부족했던 책가방에 대한 포만감을 느껴보는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이승의 문을 지나 먼저 가신 저 세상에서 가난했던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슴에 안으신 채, 언젠가 만나게 될 추억의 손가방을 들고 나를 기다려 주시리라. 나를 낳아주신 친어머니가 내 육신의 어머니라면 길러주신 어머니는 나를 가슴으로 낳아주신 분이다. 친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지만 새어머니는 늘 내 눈물샘을 자극하는 분이다. 그 어머니가 가신 음력 3월 보름에는 어머니가 그토록 소중히 하셨던 그 손가방과 꼭 닮은 가방을 하나 사야겠다.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나에게 인생의 희망을 걸고 지극히 믿어주셨던 어머니의 비원을 담아주셨던 그 손가방 덕분에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 동안 생각을 갈고 닦는 일에 목말라 하는 지도 모른다. 늘 채웠다가 비우는 연습을 하며 주인의 의지에 따라 용도가 바뀌는 손가방. 어머니는 비록 나를 몸으로 낳아주시지는 못했지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나를 끔찍히 아끼신 분이었다. 그 마음을 담아 슬픈 서울 길에 당신을 대신하여 딸려 보낸 손가방에 마음을 담아 나를 지켜 주셨던 내 어머니!

먼 후일 어머니를 다시 만나는 그 날, 지상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 딸노릇을 다하렵니다. 그 때는 어머니, 당신의 손가방에 제 마음과 영혼, 가슴까지 가득 담아 어머니의 딸로 태어나겠습니다. 생전에 드리지 못한 말, "사랑해요! 내 어머니! 그리운 내 어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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