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고대 국가는 영토를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농경, 목축 등 생활을 하면서 일정한 토지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제 주거를 지키는 방어 시설이 필요했다. 이러면서 성곽 내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또 인간 사회의 발달로 권력자가 출현하면서 성은 국가 권력을 지키는 수단이 되었다.
수원 화성(華城)도 마찬가지다. 마을을 지키고, 왕권을 지키는 성곽이다. 성은 적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건축물이다. 다시 말하면 일종에 군사 시설이다. 실제로 화성에는 전투 시설물이 많다. 높은 감시소인 적대가 있고, 성 밖의 동태를 살피는 노대가 있다. 화포 공격이 가능한 포루, 지휘소인 장대 등은 모두 전쟁에 효율적인 시설이다. 그리고 치성이나 옹성도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이다. 화성은 평성과 산성이 함께 이어져 있는데, 이도 평성의 전투력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화성은 단순한 성(城)이 아니다. 화성은 군사 시설이지만 너무 아름답다. 적당히 높은 산등성이에 벽돌로 치장한 모습이 평화롭게 보인다. 게다가 산은 산대로, 평지는 평지대로 자연의 생명이 숨 쉰다. 화홍문을 바라보고 있는 방화수류정은 성이 아니라 화려함 그 자체다. 역사가 있고, 정신이 있다.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오랜 세월에도 메마르지 않는 군주(君主)의 사랑이 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의 상처를 안고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는 시대의 희생자였다. 당쟁에 휘말려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정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정조는 강력한 왕이 되고 싶었다. 화성 건설은 그 시발점이었다.
정조 18년(1794년)에 정조는 아버지의 능을 수원으로 옮겼다. 정조는 뒤주 속에서 슬프게 죽은 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조선 최대의 명당인 수원의 화산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정조는 화산에 있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소를 찾는 동안 화성 행궁에 머물렀다. 그리고 화성 행궁에서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열기도 했다.
화성은 실학자인 유형원과 정약용이 설계하고, 거중기 등을 이용해 과학적으로 쌓았다. 성벽은 팔달산 정상부터 산세를 타고 쌓았다.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창룡문, 장안문, 화서문, 팔달문과 각종 방어 시설은 화성의 특징이다. 국방의 요새로 활용하기 위해 성 주위에는 총이나 활을 쏘는 구멍을 냈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옹성은 성을 지키는 역할을 하지만, 오늘날은 성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랑하는 화성은 사실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정조가 남긴 화성은 역사의 혼란 속에서 상처를 입었다. 우선 일제강점기에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 기관이 들어서면서 여러 곳이 훼손되었다. 일제는 의료 기관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유적을 마구 파헤쳤다. 우리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려는 의도였다. 행궁은 6.25 전쟁 때도 온전하지 못했다. 시 한복판에서 탱크로 싸웠으니 곳곳에 타격을 받았다. 장안문은 웅장한 문루가 자랑인데, 반 이상을 잃었다. 성벽 위의 건축물 포루와 공심돈 등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화성이 옛 모습을 찾은 것은 1975년 이후에 시작된 복원 공사다. 당시 복원은 눈짐작이 아닌 기록에 의한 것이었다. 화성은 성곽뿐만 아니라, ‘화성성역의궤’를 남겼다. 이 책은 화성 건축에 관한 완벽한 공사 기록서이다. 이 책에는 공사 일정, 관계자 명단, 공문서, 장인 명단과 지급 노임 규정, 자재 명칭과 수요, 들어간 비용 내역 등이 들어 있다. 특히 시설물들을 그림으로 설명한 도설(圖說)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화성이 복원되었다.
사실 본래의 모습을 잃고 복원된 유물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사례는 없다. 그런데도 화성이 1997년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이 기록물 때문이다. 의궤를 통해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도 결국 우리의 기록 정신까지 높이 사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이다.
화성을 건축하면서 기록을 남긴 정조의 의도는 무엇일까. 그것은 먼 뒷날 역사의 격동까지 예연한 군주의 마음이다. 인간사는 역사의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세심한 기록을 남겨서 미래 후손들에게 전해주려는 의도였다.
화성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시간에 대해 생각한다. 시간은 돈이라고 한다. 진짜일까.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명예를 쌓기 위해 만들어놓은 메커니즘일 뿐이다. 시간조차도 돈으로 생각하는 우리들의 삶이 안타깝다. 우리는 바쁜 일상을 운명처럼 달고 사는 것은 아닐까. 다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생각한다. 과거의 시간은 쇠약해지거나 소멸돼 온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진보하고 발전해 오는 것이다. 화성의 성곽이 시간을 초월하여 역사를 간직한 품이 넉넉하다. 성곽의 거무스름함도 시간의 무상함을 비웃듯 오히려 검게 반짝이고 있다. 묵묵히 볕을 쬐고, 바람을 쐬며 커온 주변 거목들도 시간을 초월하여 성장하고 있다.
우리는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정신없이 변화하는 세상에 편리한 기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후손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 화려한 문명의 이기를 남겨서 혜택을 줄 수 있을까. 영원의 실체는 알 수 없지만, 화성과 그 옆의 거목은 시간을 초월해 영원과 맞닿아 있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