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찔레꽃이 밭 언덕을 수놓은 유월이 시작됐다. 유년의 기억에 자리한 유월은 짙어지는 초록빛, 누런 보리밭, 탈곡 후 뒤끝을 태우는 자욱한 연기 가득한 들판으로 남아있다. 요즘은 봄이 실종된 것 같다. 송홧가루 날리는 사월과 신록의 계절인 오월이 언제 곁에 있었는지도 아른한 채 열기를 머금은 여름이 벌써 손을 내민다.
일곱 명이 주인인 교실, 더워지는 날씨로 창문을 자주 연다. 정오를 지나면 먼바다와 섬 이야기를 머금은 해풍이 아이들 곁으로 다가온다. 책상 위 종이가 날리고 환경게시물이 펄럭이고 이름 모르는 새소리가 교실을 머물다 금산 자락으로 빠져나간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줄께 새집 다오.” 음악 시간 전래동요를 익히다 두꺼비가 어떻게 가냐고 묻자 개구리처럼 뛴다는 아이, 엉금엉금 기어간다는 아이 등 의견이 분부하다. 그리고 두꺼비 집 짓는 놀이는 어디서 하냐고 묻자 모두 모래밭에서 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5분 거리에 있는 바닷가 모래사장을 찾는다.
비둘기도 울고 까치도 날고 조그만 텃밭에 갈무리 되고 있는 마늘은 매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툭 튄 바다와 넓은 모래사장을 보자 약속이나 한 듯 내달린다. 어제까지 비바람과 천둥을 동반한 오월의 여름비가 지나간 해변엔 군소, 바다 우렁이, 미역, 고둥 해초들이 밀려와 있다. 제한된 공간 속 붙박이에서 자유로 바뀐 시간 아이들의 눈빛은 초롱초롱 빛난다.
두꺼비 집을 짓자는 말에 모두 모여 앉는다. 물기를 머금은 곳에 앉은 녀석은 잘 된다고 웃고 그보다 위쪽에 앉은 아이는 잘 안된다고 투덜 된다. 그래서 두꺼비 집을 지을 때 황새가 왜 물을 길으러 갔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자 준비한 비닐봉지에 바닷물을 떠와서 모래를 적신다. 그제야 모래가 잘 뭉쳐져 집이 잘 만들어진다며 얼굴이 환해진다. 그리고 왜 물이 모래에 섞이면 단단해지는지 질문을 한다. 물은 모래 알갱이들 하나하나를 손을 잡게 하는 사랑의 힘이 있다고 하자 고개를 갸우뚱한다.
조잘거림이 파도소리에 합창이 되고 시간은 물흐르듯이 돌아갈 시각을 가리킨다. 아이들은 모래사장에 가면 무한한 상상력이 다양한 형태로 살아나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다음에 다시 오기로 하며 일어서는 순간 “손에 묻은 모래를 어떻게 해요” 한다. “자 팔을 날개처럼 뻗고 손가락을 벌려서 저기 솔숲까지 가서 손뼉을 치면 된다” 며 걷는다. 물기가 증발하자 모래는 쉽게 떨어진다. 그렇지만 손이 끈끈하고 짠맛이 난다고 싫어한다. 그건 오늘 우리가 여기 온 흔적을 바다가 전해주는 편지라고 하자 짠맛 편지도 있다며 웃는다.
솔숲을 벗어나자 밭 언저리에 강아지풀이 자라고 있다. 이 강아지풀 꽃으로 쏙 잡을 때 쏙을 꼬이는 데 이용하였고, 잎은 두 주먹 엄지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불면 풀피리가 된다며 소리를 내자 신기해한다. 요즘의 아이들! 발달하는 디지털 문화에 매료되어 여유도 사라지고 체험도 의도적으로 해야 한다. 이런 현상은 시골아이나 도시아이나 마찬가지이다. 너무 세게 불면 고음을 내며 찢어져 버리는 풀피리. 내 유년시절 학교 가는 논두렁 밭두렁 길 옆에 보리가 피면 뽑아서 피리도 불고 깜부기를 뽑아 수염도 그리곤 했다. 어쩌다 깜부기 보리 뽑는 주인이 있는 것도 모르고 보리를 뽑다가 들켜 줄달음을 치던 일, 전교 애향반 모임 시 주제가 농작물을 해치지 말자고 한 기억이 새롭다. 허리가 구부러져 마늘을 갈무리하는 노인들에게 “삐” 소리는 사라진 기억을 감아올까?
바다가 불어주는 바람을 뒤로 받으며 금산을 쳐다본다. 기암괴석과 짙은 푸름으로 뒤덮인 금산은 두 팔 벌려 포근한 품으로 녹색의 비단 저고리 풀어 보듬어 준다. 풀피리를 불며 한하운 시인이 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떠올린다 .
그리움은 언제나 살아 움직인다. 두꺼비 집 짓기 놀이, 동심을 그리워하며 꿈을 키우는 눈부처가 된 나도 다시 한 번 눈을 비비며 맑고 투명한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그리고 놀거리가 없어도 넉넉했던 유년을 떠올리며 이 아이들에게 성장하여 되새김할 작은 그리움과 소망을 진한 잉크로 기록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