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문화에 살면서 나만의 서재를 갖기란 쉽지 않다. 경제적 형편이 되어 넓은 공간에 살고 있더라도 텔레비전과 컴퓨터에 우선적으로 자리를 뺏기는 경우가 많다. 서재를 갖추는 것은 공간의 크고 작은 것을 떠나 집 주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작은 공간이라도 황상(1788~1870)의 일속상방처럼 좁쌀처럼 작은 집에 서재를 꾸릴 수 있다. 조그만 방안에 온 세상이 다 들어 있는 셈이다. 그러니 집은 작지만 사실 그 작은 방안에 온 세상이 다 들어 있으므로 세상에서 제일 큰 집일 수 있다. 그것은 부처가 말한 "수미산을 겨자씨 속에 넣는다"는 의미이다. (244~245)
나에게 작은 희망이 있다면 책으로 가득 찬 서재에서 책을 보며, 찾아 오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자연 속에서 깊은 묵상에 빠져 보는 삶이다. 꿈 같은 삶이지만 생각만 해도 설레인다. 경쟁과 분주함 속에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한 번 쯤은 살아가고 픈 삶이다.
박철상 선생님의 <서재에 살다>는 정조 임금 시대에 활약했던 인물 중에서 책을 가까이 하며 자신만의 서재를 만들어 당시 문화의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이들의 서재 이야기를 담아낸 책이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부터 -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연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등-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당대에 학문의 업적을 이루었던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서재를 만들게 되었고 그 서재에서 어떤 성과를 이뤄냈는지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위 인물들의 공통점은 정조 임금이 그들을 발탁하여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는 점이다. 신분 상승의 제약이 있었던 서얼 출신들이었으며 양반이기는 하지만 청요직에 나가지 못할 형편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개혁정책의 적임자로 그들은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약하였으며 청나라 사신의 일행으로 발달된 문물을 수입해 오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청나라를 다녀온 뒤 기행문 형식으로 기록한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시 상당한 사람들이 문체를 문제삼고 있었다. 연암은 화가 났지만 참고 해명을 한다. "불공평한 세상, 내 맘대로 뭘 할 수도 없는 세상, 힘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느냐? 그저 문장의 힘을 빌려 나의 답답한 심사를 쏟아 냈을 뿐이다. 그냥 한번 웃자는 것이다. 뭐 내가 본래부터 이런 걸 좋아해서 썼겠느냐? 하지만 너희들은 젊고 재능도 있으니, 나를 배우지 말고 순정한 고문을 익혀서 임금을 잘 모시해도 해라"(51)
"꼭 취직해서 많은 돈을 벌어야만 잘 사는 것인가? 그런 삶을 살기 위해 꼭 남에게 무릎을 굽혀야만 하는 것인가? 연암 자신의 삶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53)
유금(1741~1788) 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 중 한 사람인 유득공의 숙부다.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서호수 등과 교유했다. 이를 보면 그가 조선 후기 북학파의 일원임을 알 수 있다. (61)
조선 후기 문화사, 학술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 하나만 들라면, <한객건연집>의 편찬과 이를 둘러싼 조선과 청나라 문인들의 교유를 꼽을수 있다.(62)
책을 가지고 있어도 그 책을 제대로 볼 능력이 없으면, 책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빌려주어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책에 자신의 소유권을 표시하는 인장만 찍어두고 읽지도 않으면서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는다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당시 청나라에서 신간 서적이 수없이 들어왔지만, 제대로 읽지도 않고 서가에 쌓아두고서 빌려주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박지원은 바로 그런 시대적 풍조를 비판했다.(66~67)
옛 선비들 중 책을 좋아한 인물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이덕무(1741~1793)처럼 책을 좋아하고, 책에 관한 일화를 많이 남긴 인물도 드물다. <한객건연집>이 청나라에 소개되면서 이덕무는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과 함께 사가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후 정조 임금에게 발탁되어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고, 정조 시대 서적 편찬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 이덕무는 아주 많은 호를 지었고 서재 이름도 여러 가지를 사용했지만, 이 모든 게 책과 가난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덕무의 일생에서 책과 가난에 관한 이야기를 빼면 아마 할 이야기가 거의 없을 것이다.그는 참으로 책을 통해 태어나 책과 함께 살다 책 속으로 돌아간 사람이었다.(72)
이덕무는 변변치 못한 서얼 서얼 출신이었다. 사회적 차별이 심하여 사회에 대한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독서를 통해 해결했다. 사회의 모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보다는 독서를 통해 그것을 순화시켜갔다. 단순히 책 속의 지식만을 추구한 게 아니었다. 그의 목표는 성인의 경지에 가깝게 다가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83)
조선시대 장서가들의 서재에 놓일 만한 책은 거의 없었다. 상업용 서적은 주로 실용적인 서적이나 과거용 서적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양질의 서적을 구하는 방법으로는 높은 관직으로 올라 왕으로부터 하사를 받거나, 인맥을 동원해 관아에서 간행된 서적을 구하는 게 최선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장서가란 일반인이 도달하기 힘든 위치에 있었다.(161)
추사 김정희는 조선 최고의 금석학자였다. 금석학은 옛 비석이나 쇠붙이 등에 새겨진 글자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당시 중국에서는 금석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216)
추사 김정희에게는 특별한 지우가 있었다. 역관 이상적이었다. 추사가 관직을 잃고 제주도로 유배갔을 때에도 변치 않는 우정으로 추사가 읽을 책들을 중국에서 구하다가 보내주었다. 추사는 모든 친구들이 떠나고 홀로 남은 이상적을 위해 <세한도>를 그려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하였다.
잘 나갈 때 곁에 있는 친구보다 보잘 것 없는 형편에 있을 때 곁에 남아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