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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자연 시인 고산 윤선도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조선 시가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시조 작품은 정철의 가사와 더불어 조선 시가문학의 쌍벽을 이루어 한국 문학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하지만 고산은 생전에 불우한 현실에 있었다. 그의 호처럼 산에서 외로이 홀로 있었다.
고산이 51세 되던 해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강화도에 피란 중이던 원손대군과 빈궁을 구출하고자 사내종들과 의병을 태우고 갔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고산은 왕을 호종(임금의 거가를 모시고 따라감)하지 않았다 하여 경상도 영덕현으로 유배의 명이 났다. 약 8개월의 유배 생활 후에 그는 해남으로 귀향한다. 이곳에서 은거 생활을 하던 중 금쇄동을 찾는다. 금쇄동은 지금도 사람이 찾지 않는 오지다. 그러니 당시에도 사람이 드문 깊은 산속이었다는 것을 추측을 할 수 있다. 고산은 세속의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이곳에 왔다. 그곳에서 심신을 달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고산은 벼슬에서 파직되고, 유배까지 갔다 왔다. 삶은 부서지고 더 이상 기댈 것이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도 모르는 오지에서 가혹한 현실을 이겨내는 작품을 남겼다. 그것이 나이 56세 때 금쇄동에서 남긴 작품 <만흥(漫興)>이다. <산중신곡> 가운데 6수로 된 연시조다.

산슈간(山水間) 바회 아래 뛰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욷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향암(鄕闇)의 뜻의는 내 분(分)인가 하노라(만흥 1)

속세에서 삶은 혼탁했다. 자신의 의지는 곧았지만, 현실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제 속세를 벗어나서 자연에 왔다. 욕심 낼 것도 없는 이곳에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거처를 마련한다. 세상 사람들은 한심하다고 비웃을 줄 모르지만, 이것이 분수에 맞다고 생각한다. 안분지족의 사상을 한문을 버리고 우리말로 썼다. 당시 지배층의 언어는 한문이었다. 우리말로 시를 쓰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고산은 고향에 와서 거추장스러운 한문을 버리고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노래했다. 이제 은일의 공간에 고답적인 문자를 버리고, 자연과 함께 하니 마음의 평화가 찾아온다.

보리밥 픗나물을 알마초 머근 후에
바횟 긋 믉가의 슬카지 노니노라
그 나믄 녀나믄 일이야 부럴 줄이 이시랴(만흥2)

고산은 호남 지방의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이어온 재산도 상당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고산이 벼슬을 하지 않은 생활이 계속되면서 가세는 많이 기울었다. 금쇄동 생활이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마음만은 평온하다. 비록 ‘보리밥에 풋나물’을 먹더라도 부귀영화는 꿈꾸지 않는다. 가난하지만 만족하고, 자연에서 실컷 놀 수 있기 때문에 부러운 것이 없다.

잔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러하랴
말씀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 하노라(만흥 3)

옛 노래에서 우리말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쓴 시가 있을까. 우리말로 소박한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전혀 과장도 없이 마음을 잔잔하게 한다. 무욕(無慾)의 상태에서 자연을 바라보면 이런 생각이 날까. 바쁠 것 없는 산에서 술을 벗 삼아 자연을 바라보니 임이 오는 것보다 반갑다. 자연이 임보다 반갑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에 대한 몰입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들었을 때 가능하다.

누고셔 삼공(三公)도곤 낫다하더니 만승(萬乘)이 이만하랴
이제로 헤어든 소부허유(巢父許由)ㅣ 약돗더라
아마도 임천한흥(林泉閑興)을 비길 곳이 업세라(만흥 4)

세속적 욕망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연 속에서 자연과 벗하며 사는 것에 만족하는 고산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라고 한 것처럼, 벼슬길은 권세가 있을 때에는 아첨하여 좇지만 권세가 떨어지면 푸대접을 한다. 이런 조정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왔다. 조정에서 파벌 싸움을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자연과 더불어 세속을 잊고 사는 것이 3정승(영의정,좌의정,우의정)보다 천자의 지위보다 편안하고 안락하다.

내 셩이 게으르더니 하늘히 아라실샤
인간만사(人間萬事)를 한 일도 아니 맛뎌
다만당 다토리 업슨 강산(江山)을 딕희라 하시도다(만흥 5)

자연에 머물게 된 것은 하늘이 부여한 운명이다. 이런 운명에 순응하기 때문에 속세에 대한 원망이 있을 수 없다. 고산이 자연을 만난 것은 운명이기 때문에 혼연일체가 될 수 있었다. 자아가 완전히 자연 속에 몰입된 상태, 자연이 곧 나요, 내가 곧 자연이라는 경지에 이른다.

강산(江山)이 됴타한들 내 분(分)으로 누얻느냐
님군 은혜(恩惠)를 이제 더욱 아노이다
아므리 갑고쟈 하야도 갚올 일이 업세라(만흥 6)

이 노래 역시 자연 속에 묻혀서 산수를 즐기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생활을 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다. 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공통된 의식구조다. 고전 문학에서 연군에 대한 정은 아첨이 아니라 선비의 충성심이다. 마찬가지로 고산은 귀양을 다녀오고 정계에서 은퇴하여 고향에서 은거의 생활을 하면서도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고 있다.
고산은 성품이 강직하여 20여 년을 귀양살이로, 19년간을 은거 생활로 보냈다. 어린 성장기를 지나서 한창 일할 나이에 평생을 고통과 핍박으로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가 남긴 작품은 맑고 깨끗하다. 힘겨운 삶에 굴복하지 않고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결과다. 거기에 우리말을 사용하겠다는 의식도 돋보인다. 자연관, 언어관이 천재에 가까운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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