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한글날이다. 한글을 통하여 한국인은 문맹이 없는 국가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문맹을 벗어났다고 해서 자만할 것은 아니요 한글을 통하여 국민의 지적인 수준을 향상시켜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바로 독서하는 것이다. 지금은 계절적으로 덥지도 춥지도 않아 책 읽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그런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좋은 시설을 갖춘 도서관에 가 보면 거의 텅 비어있는 모습이 안타깝다.
어느 곳 무엇인가가 우리는 부르는 소리가 많아서 그 무엇에 홀려 있기에 도서관은 멀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는가를 알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책도 팔리지 않아 출판사들이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어제 만난 시인 용혜원씨는 "항상 하는 말만 반복하니 싫어한다면서 책좀 읽으라."고 권고하고 있다. 책도 영화도 보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영화 '광해'를 통하여 상당히 알고 있는 인물 광해군은 임금이 되면 어떻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이미 경험하였다. 그는 임진왜란으로 선조와 광해군으로 조정을 둘로 나눠 국사를 처리를 한 것이었다. 전쟁 중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과 힘을 합쳐서 일하던 것과 전쟁이 끝나고 양반·사대부들이 둘러싼 조정에서 그들의 말만 듣고 정사를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현실성이 없는 것인지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가끔 미복잠행을 통해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보고 들었다. 이를 보니 백성들의 현실과 중신들의 입을 통해 간접으로 듣는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도 딴판이었다.
그는 도대체 중신들을 믿고 정치를 할 수 없었다. 그때 광해임금이 의지할 수 있는 중신이 딱 한사람 나타났다. 바로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다. 본시 글재주가 있고 또 아버지도 조정에서 든든한 배경을 이루고 있던 허균은 28살에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함으로써 그 장래는 떼어놓은 당상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는 외직으로 삼척부사를 지냈고 안으로는 형조판서와 의정부 참판을 지냈다.
원래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 일가를 이루었던 그는 1610년에는 중국 북경에 갔다가 천주교에 접함으로써 그의 일생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천주교까지 이해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눈길은 아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서자 출신이며 명문장이던 이달에게 글을 배웠던 탓으로 스스로를 서민으로 자처하던 그는 중국의 소설중에 특히 수호지를 탐독했고 자기도 그런 글을 써보기로 결심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허균은 1610년(광해군 2년) 10월 전시의 대독관의 한 사람이 되어 과거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자신의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사헌부에서 탄핵 당했다. 그러나 허균을 사랑하던 광해임금은 허균이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탄핵에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11월 내내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수십 차례 탄핵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조치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허균은 42일간 의금부에 갇혀 지낸 뒤 그해 12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로 유배길에 올랐다.
그러나 허균은 자신이 유배를 살던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학동들을 데려다 가르치는 한편, 글을 써서 1611년(광해군 3년) 문집 ‘성소부부고’ 64권을 엮었고 1612년에는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저술했다. 그가 ‘홍길동전’을 저술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서출의 몸으로 왕이 된 광해임금의 즉위의 타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서출이라도 능력이 있는 자는 얼마든지 그에 부합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왕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당연히 해당된다는 것을 서출이라는 홍길동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즉 신분은 아무 쓸모도 없는 하나의 껍데기일 뿐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됨됨이와 능력이라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그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주장을 담은 것이다. 양반·사대부들이 자신의 밥그릇 지키기에 여념이 없어서 행여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을 넘볼까 두려운 터에 자기 스스로 양반이면서 그런 발상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허균이 그런 사상을 갖게 된 데는 그가 지닌 창작에 대한 열정과 사상이 그를 자유롭게 한 점도 있지만 그 이전에 아버지 허엽의 영향도 크다. 초당은 강릉군수 시절에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팔던 콩이 당시에는 쌀에 비해 너무 싼 값에 팔리는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초당 맑은 물로 두부를 만들어 팔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수입을 증진시키는 데 앞장선 사람이다.
그런데 백성을 위해 두부를 만들어 팔게 한 행위가 도리어 지방 수령이 장사를 했다는 누명으로 뒤바뀌어 초당은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허엽은 자신의 호를 초당이라고 할 정도로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초당두부’ 판매를 위해 노력한 관리였다. 어려서부터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다 보니 허균의 백성 사랑도 유별나고 자유로웠다. 당시의 조정이 오로지 유학을 받드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유롭게 절에 드나들며 참선을 하면서 자신의 정신자세를 새롭게 가다듬기도 하였다. 인간 됨됨이가 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천민이든 서자든지 주변 눈치에 상관하지 않고 교분을 맺고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과 인생살이를 논하곤 했다.
그런 허균이기에 주변의 양반‧사대부들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자신들이 점유하고 있는 신분이라는 틀에 누군가가 더 들어오는 것을 금기로 여기던 시대에 용납될 수 없던 행동거지였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목숨을 걸고 왜적을 물리친 것은 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양반들이 아닌가. 나라가 위험할 때 백성들이나 승병, 의병이 나서서 나라를 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란이 끝난 뒤에는 각자 자신들이 맡은 일을 해서 양반·사대부들이 존재하게 하는 것을 나라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는 묘한 논리를 가졌던 지배층이었다. 백성들은 단지 나라와 양반·사대부들을 위한 도구였던 셈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입으로는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는 자신들의 붕당과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에 손해가 되는지를 먼저 따졌던 그들이다. 그런 양반들에게 허균의 백성 사랑 사상이 눈에 가시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을 터다.
그러나 광해가 보는 허균은 달랐다. 특히 허균이 자신이 어떤 일을 당할지 빤히 알면서도 ‘홍길동전’을 써서 발표한 것을 보고 광해는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홍길동이 서자임에도 영웅으로 묘사했다. 광해 자신이 서자인 까닭에 양반·사대부들이 드러내 놓고 비판을 하지 못하지만 서자를 영웅으로 묘사해 신분차별이 없는 새로운 왕국을 세운 이야기를 쓴다는 자체만으로 자칫 잘못하면 역모를 꿈꾸는 사람으로 몰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허균은 유배지에서 ‘홍길동전’을 썼다.
이처럼 허균이 관리의 몸으로서 글을 즐겨 쓸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누님인 허난설헌의 영향이 있었으리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신동의 칭송을 듣던 누님이 평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모습을 보면서 허균도 책을 가까이 하는 것을 생활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남의 어른이 된 사람은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뒤따라오는 아우나 자손에게 귀감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 좋은 계절에 책을 들어야 한다는 점을 579돌 한글날을 맞이하여 이 아침에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