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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섣달 그믐날에

오늘이 마지막 잎새 같은 섣달 그믐이다. 이 세상 누구라도 올 한 해 정말 잘 살아보고 싶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즈음이면 많은 이들이 보람을 수확하기보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젖어들기 일쑤다. 올해 안에 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한 일들을 생각하면 아쉽기 그지없고, 심지어 시간의 속도에 불안해하기도 한다. 일찍이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이렇게 썼다. “무엇이 사람들을 불안하게 할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자신의 개념들을 사물들 자체와 일치시킬 수 없기 때문이고, 향락이 그들의 손아귀에서 슬쩍 빠져 달아나버리기 때문이며, 소망했던 것이 너무 늦게 오기 때문이며, 달성하고 성취한 모든 것도 인간의 욕망이 애초에 기대했던 만큼 그렇게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지.”라고...

이는 고전적인 이야기이지만 지금, 여기서도 여전히 통하는 얘기처럼 들린다. 우리는 소망이라든지 계획, 목표의 지시 대상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한 해를 살았기에 그 숙명적 안타까움 속에서 불안해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많던 시간들은 어느새 어디로 다 빠져 달아나버린 것일까? 연초에는 1년 365일이라는 시간이 광장처럼 넓게만 보이더니, 이제 연말의 남은 시간은 마치 폐쇄 감옥처럼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연초에 가망 있는 희망처럼 보이던 것들이 어쩌다가 가망 없는 욕망이 되어버린 것일까. 가망과 욕망 사이의 거리가 너무 크다. 가망과 난망 사이의 거리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되돌아보면 올 한 해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한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종종 시간이 내것이 아니었고, 늘 허덕이며 살아진 것 같다. 예기치 않게 밀어닥친 많은 일들에 치여 살았다. 정작 나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다. 내 영혼을 보살피지 못했고 나의 과제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했다. 특히 가족이 원하는 만큼 가족에게 정성을 다하지 못했고 친구들에게는 무심한 자로 지낸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다. 그 밖에 바쁘다는 핑계로 주변과 공동체의 의무를 소홀히 한 것 같아 면구스럽기도 하다.


무엇보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쁜 사람 시간 많이 뺏으면 안 되지’ 하는 불안을 주었다면 그분들로부터 용서를 받고 싶다. 깊이 반성한다. 여유를 가늠하지 못했던 가난한 마음을 뉘우친다. 어쩌다 보니 예기치 않게 반성문을 쓰는 시간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나의 반성문은 더 길게 이어져야 하리라. 그럼에도 아무것도 아닌 한 해는 아니었다. 그리 믿고 싶은 마음이 불쑥 기지개를 켠다.

나에겐 정말 인생의 1막을 내리는 단 한 번 경험하는 해이기도 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를 기억하여 준 모든 사람들과 그리고, 한 해 동안 만났던 사람들, 함께 했던 일들, 나란히 걸었던 길들, 그 어느 구석에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흔적들도 숨 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스며든다. 자기합리화 기제가 발동한 것일까? 다시 부끄러운 반성 모드로 들어선다.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이런저런 분주함으로 허비한 나날들, 도둑맞은 시간들을 어찌 되돌릴 수 있겠는가. 성찰의 통로를 지나서 새해에는 "제 영혼의 길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아름다운 아레테(탁월함, 그리스 신화 속 왕비)를 선물해주세요.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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