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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계룡산 흰돌머리, 그 황제를 위하여

한가위를 앞둔 시장에는 사람들과 물건들로 가득합니다. 시절은 아름다운 가을을 향하여 걸음을 옮기고 있습니다. 빳빳하게 군기가 든 모습으로 무논을 지키던 초록 모들은 여름을 지나 어엿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여문 씨알들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색은 황금빛입니다. 이따금 메뚜기가 뛰고 여치와 잠자리들이 끝물고추밭을 이리저리 돌아답니다. 아직은 가을 초입이어서 여름 꽃들이 기세를 올립니다. 왕고들빼기의 연노랑꽃들이 흐드러지고 맥문동도 푸른 열매와 보랏빛 꽃을 함께 달고 있습니다. 분홍 메꽃은 밭둑에 까마중 줄기를 친친 감아 무성합니다. 하지만 계절은 그대로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거리엔 이미 은행열매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떨어지기 시작했고, 아련한 꽃무릇이 무수한 꽃대를 올립니다.
저는 이제 가을을 시작하려 합니다. 갈색 스카프와 붉은빛이 도는 펠트 모자를 구입하였습니다. 약간 더운 날이지만 모자와 스카프를 착용하고 수크렁 무성한 무학산 언저리를 공원을 산책하였습니다. 산바람은 서늘하고 붉은 잎이 드문드문 보이는 벚꽃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이문열의 책을 읽었습니다.

<황제를 위하여>는 정감록을 취재하라는 데스크의 호출에 시덥잖은 잡지사에 근무하는 그는 계룡산으로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계룡산 흰돌머리 정감록의 정진인으로 추정되는 황제의 삶을 조선의 마지막과 일제강점기, 한국동란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얹어서 읽었다. 혹자는 돈키호테와 같은 삶이라고 평하기도 하고, 김현은 전통문화의 회귀욕망과 거부 의지 사이의 섬세하지만 치열한 싸움의 무의식의 결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정감록[鄭鑑錄]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언서로 난세에 풍수설에 따라 복정(卜定:점쳐서 정하는 것)된 피난처에서만 지복(至福)을 누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정씨(鄭氏) 성의 진인(眞人)이 출현하여 이씨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것을 중심으로 하는 예언이다. 미래에 다가올 멸망에 대비한 피난처의 이상경(理想境)에 대한 동경이 ≪정감록≫ 전반을 꿰뚫고 흐르고 있다.
당초에는 병화를 피하는 소극적이고 은둔적인 사상이 ≪정감록≫과 관련하여 민심에 크게 우합(偶合)한 것이지만, 조선 후기의 하대로 내려올수록 반왕조적인 색깔이 짙어져서 반란이나 대소규모의 민란은 모두가 ≪정감록≫에서 우러나온 진인출현설이 압도하게 되었다. 더욱이 19세기의 민중운동이 모두 ≪정감록≫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동학을 기점으로 속출한 한국의 종교운동이 거의 모두가 ≪정감록≫과 한 맥으로 통하고 있다고 할 만큼 민중의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정감록≫은 신비하고, 어떻게 보면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전통사회의 예언서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실제는 조선시대의 사회사상사를 엮는 데 불가결한 사료로 평가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어리석은 듯 보이는 황제의 삶은 진실 된 삶이라 생각합니다. 약은 고양이가 밤눈 어둡듯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목을 매고, 물질적이고 권위적인 것으로 판단으로 이 세상에 맑은 바람같은 그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계룡산 흰돌머리, 남조선국 황제의 무덤가에 흰구절초 한 송이 피어를 그를 그리워하겠지요.

가을은 매일매일 한 걸음씩 다가섭니다. 서툴게 그를 마중간다고 두른 스카프가 덥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신을 보면서 계절을 그저 무심히 왔다가 무심히 가는데 혼자서 난리를 피웠다는 반성을 합니다. 행복한 가을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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