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마포구 아현2동 재래시장에 인접한 아현초등학교. 불과 2∼3년 전만해도 교문만 나서면 그야말로 '시장바닥'이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학교 담벼락에 맞붙어 수십개의 간이술집과 포장마차가 즐비하고 도로와 인도의 구분조차 모호한 길에는 유료주차장이 자리잡고 있다. 주점들의 영업은 밤에 이뤄지지만 아침이면 온갖 쓰레기와 음식물 찌꺼기로 학생들은 코를 막고 등교해야 하는 실정이고 주차장으로 들락거리는 차량들로 인해 교통사고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교문 나서면 술집 등 유해환경 즐비
아현초의 대변신은 1999년 가을부터 시작됐다. 당시 새로 부임한 이송자 교장(지난해 9월 강서교육청 초등과장으로 옮겨 근무하던 중 올 2월 뇌출혈로 타계)은 학교 살리기는 주변환경을 바꾸는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뜻을 같이한 교직원과 학부모들은 학교주변 유해시설 추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펼치는 한편 아름다운 학교 만들기 캠페인을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학교측은 청와대와 교육부에 탄원서를 내고 어린 학생들도 어깨띠와 피켓을 들었다. 3000여명의 학부모와 지역주민들이 서명에 동참하는 등 열기가 높아지자 관계기관에서도 차츰 관심을 보였다.
물론 생계수단을 위협받게 된 상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결국 술집 2곳, 쓰레기 하치장, 무허가 노인정 등이 정리되고 상당수의 포장마차가 옮겨갔다. 현재는 10여개의 주점이 남아 있지만 야간영업이 끝나면 자율적으로 주변을 청소하는 등 학교와 학생들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 구청에서도 항상 상인들의 청소상태를 점검하고 미흡하면 공익요원을 보내 돕고 있다. 녹색어머니회는 매일 학생들의 등하교 시간에 맞춰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학교가 있거나 말거나, 학생들이 오가건 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던 상인들의 태도가 바뀌고 학부모들도 '우리 학교'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학교 살리자… 교사와 지역사회 나서
"타성에 젖은 눈으로 보니까 아무리 나쁜 환경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는 한 선생님의 말처럼 그 전까지는 학교와 지역사회 누구도 이러한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김종진 교장은 "처음 와보는 사람들은 주변환경이 열악하다고 지적하지만 이 정도가 되기까지 전임 교장과 교직원, 학부모들이 보여준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고 밝혔다. 김 교장은 또 "낡은 교사(校舍) 한 동은 여름방학에 헐고 개축할 예정이어서 이제 학교 담에 붙어 있는 술집만 철거되면 제대로 된 학교모습을 갖출 수 있다"며 "학교와 주민들이 '교육환경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만큼 관계기관에서 해결책을 모색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주변 유해환경 정화에서 '미완의 승리'를 거둔 학교는 이제 교수-학습의 질 향상에 나서기로 했다. 상담실이 필요했다. 대다수 학생들의 가정형편이 어렵고 편부·편모 슬하에서 자라는 아이들도 많아, 상담활동의 활성화가 절실히 요구됐기 때문이다. 2000년 봄 '따뜻한 이야기 방'으로 이름 붙인 상담실이 문을 열었다. 마침 미 웨스트 체스터 주립대에서 상담을 공부한 오인수 교사가 상담실의 책임을 맡기로 했다. 전직 교사 등 학부모 자원봉사자 6명도 가세했다. 부모님에게 말하기 힘든 걱정이 있는 어린이, 공부방법을 모르는 어린이,학교 다니기 싫은 어린이, 부모의 이혼으로 고민하는 어린이, 따돌림을 당해 괴로워하는 어린이들이 이야기 방으로 모여들었다.
[PAGE BREAK]교수-학습의 질적 향상으로 이어져
희망하는 5, 6학년 어린이를 훈련시켜 ‘또래 상담실’을 운영하기도 하고 학부모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전학을 오거나 따돌림을 당하는 학생들은 또래 상담자들과의 역할극 놀이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가까워지게 됐다. 상담실 운영으로 소위 문제 학생들이 줄어들고 부모들도 자녀를 안심하고 학교에 보내는 분위기로 학교가 변해갔다. 오 교사는 "재개발이 전혀 이뤄지지 않은 낙후된 지역에 위치해 있고 맞벌이 부모가 대부분인 탓에 학교는 어린이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돼야 한다"며 "상담실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밝고 명랑한 웃음을 찾아주는데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측은 또 '초달실'도 운영키로 했다. 교사의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학생들 스스로 반성하며 수용할 수 있는 초달(楚撻)을 가하여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회초리는 길이 60㎝, 지름 1㎝의 매끄러운 나무 막대로 교장실에 준비됐다. 실내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경우, 친구와 싸움을 하는 경우, 차례를 지키지 않는 경우 등 학교에서 지켜야 할 규칙을 7회 이상 위반했을 때 초달을 가하기로 학생과 학부모에게 알렸다. 학교측은 "담임 교사와 함께 초달실로 오는 과정과 교장 선생님의 훈계로 만으로도 아이들이 반성하기 때문에 실제로 매를 드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소개했다. 학부모를 상대로 초달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90% 가량이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학부모들 감사 뜻으로 송덕비 선사
이 밖에도 교사, 학생, 학부모가 서로 이해하며 작은 일이라도 칭찬하는 아름다운 마음을 갖자는 취지로 '칭찬 소리함'을 만들었다. 유휴교실 하나를 내 '아현 어린이 의사당'을 열었다. 늘 자신감 없고 주눅들어 있던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 앞에서 당당히 말하고, 남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갖게 됐으며 토론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됐다. 우리 고유의 전통과 미풍양속을 일깨우기 위한 '예절실'도 학부모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또한 도서실의 도서를 확충하고 명예교사와 함께 독서가 생활화되도록 지도해 나갔다. 복도 벽면에 전 학급의 사진과 어린이들의 '엽서그림'을 게시, 공간의 효율적 활용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자투리땅에는 꽃과 채소를 심어 어린이들의 정서순화를 꾀했다. 학교는 확실히 달라졌다. 주변환경이 개선되고 무엇보다 교수-학습에 대한 열의가 새로워졌다. 교직원들은 학교와 학생을 위해 무엇을 더 해줄까 고민하고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즐거워졌다. 서울시교육청은 2000년 학교평가에서 아현초를 '특별 지원금 지급대상 우수교'로 선정했다. 아름다운학교운동본부는 지난해 '제1회 아름다운 학교를 찾습니다' 사례 공모전에서 아현초에 교육환경부문 상을 수여했다. 학부모들은 이 놀라운 변화에 ‘송덕비’를 선사한 것이다. 아현초는 오늘도 '가고 싶은 학교, 머무르고 싶은 학교'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낙진 기자 leenj@kft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