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5 (수)

  • 맑음동두천 31.3℃
  • 맑음강릉 29.2℃
  • 맑음서울 31.6℃
  • 맑음대전 31.2℃
  • 맑음대구 28.9℃
  • 구름많음울산 28.2℃
  • 구름많음광주 29.5℃
  • 구름많음부산 30.8℃
  • 맑음고창 ℃
  • 구름많음제주 29.4℃
  • 맑음강화 30.6℃
  • 맑음보은 28.6℃
  • 맑음금산 30.2℃
  • 맑음강진군 28.9℃
  • 구름많음경주시 29.3℃
  • 맑음거제 30.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한 줌의 민원이 무너뜨린 공교육의 풍경

 

한때 학교는 작은 사회이자 풍요로운 무대였다. 아이들은 이른 아침 합창단의 화음 속에서 하루를 열었고, 오후에는 오케스트라의 활시위 너머로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며 음악의 결을 익혔다. 작품 한 점, 글 한 편에도 학교의 따뜻한 인장이 박힌 상장이 주어졌고, 학급 임원 선거는 어른들의 정치보다 한층 진지한 민주주의 학습의 장이 되었다. 평가는 성장의 거울이었으며, 틀린 답 옆에 놓인 빨간 빗금은 부끄러움의 표지가 아니라 다음 발걸음을 위한 이정표였다.


그러나 지금, 이 풍경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사라지는 까닭은 교육철학의 진보적 변화도,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도 아니다. 다만 극소수에 불과한 일군의 학부모가 보내는 민원이 학교의 일상을 잠식한 결과다. 일본 교육계는 일찍이 이런 부모를 ‘몬스터 페어런츠(Monster Parents)’라 호명했고, 미국 사회는 같은 현상을 ‘헬리콥터 페어런트’와 더 공격적인 ‘잔디깎이 부모(lawnmower parent)’로 분류한다.

 

헬리콥터가 아이 머리 위를 맴돌며 위험을 감시한다면, 잔디깎이는 아이의 앞길에 놓인 풀 한 포기까지 미리 깎아 없앤다. 이름이 무엇이든 본질은 하나다. 자녀를 향한 사랑이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폭주할 때 빚어지는 비극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아이들 _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소실
한 초등학교에서는 오랜 전통의 합창단이 조용히 사라졌다. 시작은 사소했다. 오디션에서 탈락한 한 학생의 학부모가 ‘누가 심사했느냐, 우리 아이가 누구보다 음정이 부족하다는 객관적 근거를 내놓아라’는 민원을 여러 차례 제기한 것이다.

 

교사가 점심시간을 쪼개어 작성한 평가표는 곧장 의심의 대상이 되었고, 학교는 두 갈래의 길 앞에 섰다. 합창단을 폐지하든가, 오디션 없이 모두를 받아들여 음악적 완성도를 포기하든가. 결국 학교는 전자를 택했다. 한 줌의 민원이 몇십 명 아이들의 무대를 거두어 간 셈이다.


오케스트라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연습 시간을 오후로 잡으면 ‘학원 스케줄에 맞지 않는다’는 항의가 들어오고, 아침으로 옮기면 ‘이른 등교 부담을 누가 책임질 거냐, 아침은 학교에서 챙겨 줄 거냐’는 민원이 뒤따른다. 자녀의 모든 좌절을 부모가 대신 막아 주는 양육 태도는 결국 아이들의 회복탄력성과 사회적 능력을 약화시키며, 좌절을 견디는 힘이 사라진 자리에는 좌절을 가하는 모든 환경에 대한 분노만이 남는다. 아이가 견디지 못하므로 부모가 견딜 수 없고, 부모가 견딜 수 없으므로 학교가 견디기를 포기한다.


이 분노가 향한 곳은 묵묵히 자기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가르치던 교사였다. 가르침이 봉사인 시대에서 가르침이 위험인 시대로, 교실의 기후는 그렇게 바뀌었다. 학교 무대 위에 섰던 아이들의 자리는 이제 사설 음악학원의 발표회로 옮겨 앉았다. 공적 풍요가 사적 비용으로 환원된 것이다.

 

박수와 격려가 사라진 자리 _ 시상제도의 후퇴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학교는 너그러운 박수의 공간이었다. 모범 어린이상, 글짓기상, 그리기상, 달리기상, 효행상, 환경보호상…. 이름을 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다양한 상이 아이들의 자존감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많이 줘도 될까’ 싶을 정도로 후하던 그 박수는 자기 안의 가능성을 처음 발견하는 통로였고, 또래의 다른 빛깔도 함께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시상은 점차 학교의 부담이 되어 갔다. ‘내가 미대 나왔는데, 우리 아이 그림이 어디가 부족하다는 말이냐’, ‘심사 기준의 객관적 자료를 공개하라’는 민원이 잇따랐다. 더 나아가 ‘수상하지 못한 우리 아이가 정서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차마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항의까지 등장했다. 결국 적지 않은 학교가 시상이 따르는 대회 자체를 폐지하거나 시상을 생략하는 방식으로 후퇴했다. 격려를 거두는 것이 분쟁을 다루는 것보다 손쉬웠기 때문이다.

 

자녀의 성취를 자기 자아의 연장으로 인식하는 부모는 자녀가 받지 못한 상을 곧 자신이 받지 못한 상으로 받아들인다. 자녀의 좌절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통해 비추이는 자기 자아의 손상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학대당했다’는 식의 민원은 사실 부모 자신의 정서적 좌절을 학교에 전가하는 행위에 가깝다. 상처받은 것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이며, 학교는 그 상처의 반사판으로 호출된다.


상장 한 장이 사라진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노력의 결을 어른이 알아주던 의식(儀式)의 소멸이며, 인정의 통로가 가정과 학원이라는 사적 영역으로 이동했다는 신호다. 모두가 한 장의 상장도 받지 못하는 평등은 모두가 한 장씩 받던 풍요와 결코 같지 않다.

 

민주주의 학습장의 폐쇄 _ 학급·전교 임원 선거의 실종
학급 회장과 전교 회장을 뽑는 선거는 단순한 의사결정 절차가 아니었다. 후보가 되어 정견을 발표하는 떨림, 친구들의 손에 자신의 이름이 적히기를 기다리는 긴장, 결과를 받아들이고 다음을 기약하는 의젓함, 이 모든 결이 어우러져 한 사람의 시민이 길러졌다.


그러나 임원 자리가 생활기록부에 기재되고 일부 입시 전형에 활용된다고 알려지면서, 어른의 잣대가 아이들의 선거에 무차별적으로 들이닥쳤다. ‘팻말 규격을 학교가 명시하지 않아 우리 아이가 불리했다’, ‘정견 발표 때 소품 사용 가능 여부 안내가 부재했다’는 형식적 항의에서부터, ‘누가 당선되면 친구들에게 떡볶이를 사겠다고 했으니 불법 선거운동으로 조치하라’는 민원에 이르기까지, 학교는 어느덧 교육기관이 아니라 작은 선거관리위원회로 기능해야 했다. 본디 아이들이 서툰 손으로 빚는 약속과 화해의 자리가 어른의 의심과 형식 논리가 지배하는 사법적 무대로 변질된 것이다.


결과는 자명하다. 적지 않은 학교가 선거를 폐지하고 순번제로 학급 대표를 정한다. 후보가 된다는 두근거림도, 한 표를 행사한다는 시민적 효능감도, 결과에서 배움을 길어 올리는 성숙의 시간도 모두 사라진다. 극소수의 민원이 다수의 시민교육을 거두어 가는 이 풍경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소수의 거부권(minority veto)’이 어떻게 공동체의 자산을 잠식하는지를 보여 주는 슬픈 표본이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으나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결정, 그것이 오늘날 교실 민주주의의 자화상이다.

 

평가가 사라진 평가 _ 성장의 거울이 흐려질 때
평가는 본래 성장의 거울이었다. 틀린 것을 틀렸다고 짚어 주고, 다시 한번 다듬을 기회를 마련해 주는 일. 그러나 오늘의 학교에서 평가는 점차 거울로서의 기능을 잃어 가고 있다. ‘우리 아이 점수가 왜 이러냐, 다시 채점하라’, ‘내가 대학 교수인데 출제가 잘못되었다’는 민원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수행평가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 아이가 내성적인데 어찌 친구들 앞에서 노래나 연주를 시키느냐’, ‘발표 평가는 외향적인 아이에게만 유리하니 폐지하라’는 항의가 더해진다.


교사는 두 갈래 길 앞에 선다. 가르침의 기준을 굽히거나, 평가 자체의 강도를 낮추거나. 어느 쪽을 택하든 결과는 하향 평준화다. 교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도전적 과제·창의적 평가·논쟁적 토론을 회피하고, 분쟁의 여지가 적은 안전하고 표준적인 수업으로 후퇴하는 방어적 교수법(Defensive Teaching)으로 갈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손실은 교사의 위축이 아니다. 그것은 잠재력을 펼칠 무대를 잃은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발표를 기피하는 한 학생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발표 평가가 통째로 사라지면, 발표가 두렵지 않은 학생도, 발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었던 학생도, 모두 함께 기회를 박탈당한다. 한 사람의 불편을 위해 모두의 가능성을 거두는 일이 과연 옳은가. 이 불편함 속에 가장 먼저 시드는 것은 자기 한계를 마주하며 한 뼘씩 자라나야 할 아이의 성장이다.

 

승자독식의 불안, 교사를 때리다
이 모든 사태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학부모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 일본은 몬스터 페어런츠, 미국은 헬리콥터 부모 또는 잔디깎이 부모, 한국 사회는 ‘악성민원 학부모’ 혹은 ‘갑질 학부모’라 일컫는다. 어떤 이름이든 본질은 하나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압도한 상태라는 것.


이들의 심리에는 몇 가지 결이 공통으로 흐른다. 첫째, 자녀와 부모의 동일시 경향이다. 자녀의 성취·실패·감정을 자신의 그것과 분리하지 못하므로, 자녀에 대한 평가는 곧 자신에 대한 평가가 된다. 둘째, 통제에 대한 환상이다. 자녀의 인생에 닥치는 모든 변수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고 또 통제해야만 한다는 강박이며, 통제되지 않는 변수의 첫 번째 표적이 학교가 된다.

 

셋째, 소비자주의의 교육 침투다. 공교육을 협력의 장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는 시장으로 인식할 때, 학부모는 보호자가 아니라 까다로운 소비자로 변모한다. 넷째, 승자독식 사회의 불안이다. 한 칸이라도 뒤처지면 전체가 무너진다는 사회적 공포가, 가장 손쉬운 약자인 교사에게 투사된다.


거듭 강조하건대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는 극소수다. 대다수 학부모는 묵묵히 학교를 신뢰하고 교사를 응원한다. 문제는 이 침묵하는 다수의 선의가 목소리 큰 소수의 압박 앞에서 조직적으로 표현될 통로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사이에서 학교는 늘 시끄러운 쪽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는 구조에 갇힌다.


다시, 학교라는 공동체를 위하여
학부모의 정당한 의견 제기는 공교육의 자정(自淨) 작용에 필수적이다. 부당한 평가, 차별적 운영, 교사의 일탈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한다. 문제는 정당한 비판이 아니라, 공동의 자산을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인질로 삼는 극소수의 민원이다. 이는 경제학자 개릿 하딘(Garrett Hardin)이 명명한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의 교실판이라 할 만하다. 모두가 누리던 풍경이 한 줌의 사익을 위해 한 줌씩 사라지고, 마침내 풀 한 포기 남지 않는 마른 운동장만이 남는다.


회복의 길은 거창하지 않다. 먼저, 교사의 교육적 판단권을 신뢰하는 사회적 합의가 다시 세워져야 한다. 가르치는 자의 권위가 무너진 자리에 배움이 설 수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가장 단순한 진실이다. 다음으로, 정당한 의견과 악의적 압박을 가려낼 행정적·법적 장치가 더 단단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부모 스스로의 윤리적 자각이 필요하다. 내 아이만의 학교는 어디에도 없으며, 내 아이는 다른 모든 아이와 더불어 자랄 때에만 비로소 잘 자란다.


학교는 시장이 아니다. 학교는 한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약속, 곧 함께 자라기의 약속이다. 합창단의 화음이 사라진 강당, 박수가 거두어진 운동장, 선거 팻말이 자취를 감춘 복도, 평가의 빨간 빗금이 흐려진 교실. 그 풍경은 결국 누구의 자녀에게도 행복하지 않다.


우리가 잃은 것은 합창단 하나, 상장 한 장, 선거 한 번이 아니다. 아이들이 함께 자랄 권리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가장 또렷이 직시해야 할 사람은, 자기 아이를 가장 사랑한다고 믿는 우리 자신이다.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