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삶을 아늑하게 만드는 효소이다. 묵으면 묵을수록 발효가 되어 그 맛은 깊고 그윽하다. 하지만 그 맛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거듭하여 급기야는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다. 일상은 삶의 변화를 줄 힘을 필요로 한다. 일상 속 현대인은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일상에 맡겨 빨리빨리를 외친다. 느긋하게 보고 떨어져서 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래서 느림의 미학을 찬미하며 느림으로부터 안위를 찾지만 그 느림은 또다른 일상을 창출하고 그 일상 속에 매몰된 나를 발견한다.
삶은 앎의 연속이라 했다. 앎은 삶이 있어 의미롭다. 둘은 서로가 한 몸으로 서로 의지한다. 일정한 파동으로 굽이치는 파장 위에 몸을 싣고 현실을 보고 그 현실 속에 나를 맡긴다. 그 또한 일상의 논리 속에 나를 맡겨 나를 잊는다. 추락하는 곳에 날개가 있다고 했다. 무한히 추락하다보면 새로운 세계에 부딪친다. 일상은 습관을 창출하고 결국에는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다. 지나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 했던가. 일상의 틀을 벗어버리고 또 다른 일상을 창출하는 지혜는 삶을 윤기 있게 만든다. 일상을 벗어나 나와 주변을 새롭게 보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학교의 일상도 그러한 것이다. 학교의 관행들은 마치 그것이 유일한 방식인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이 분명 학생들을 소외시키고, 교사들의 삶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을 느낄지라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사람들은 일상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러한 우리의 습성을 뒤집어 직관을 얻으려는 것이 바로 새롭게 보기이다. 삐딱하게 보기, 멈춰서 보기, 물끄러미 보기, 뒤집어 보기, 들춰보기, 흘겨보기, 견주어 보기, 눈감고 보기 등의 용어도 비슷한 취지에서 사용하는 말들이다.
원래 새롭게 보기는 문화예술 영역의 한 기법이다. 일상적으로 친숙한 것들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일상생활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의 모습을 일그러뜨려 낯설게 예술을 만드는 방법이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보아왔던 것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새롭게 보여주는 것이 곧 새롭게 보기이다.
이러한 새롭게 보기 기법은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도 널리 사용된다. 낯익은 자신을 낯익은 일상 밖으로 끌어내어 자신을 타자처럼 바라봄으로써 진정한 자신과 만나고 진정한 자기 환경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교실 속에서 교사와 학생은 일상을 창출한다. 교실 공간은 교사와 학생이 만드는 일상의 덩어리이다. 그 덩어리 속으로 들어가 보면 아침조회, 1교시 2교시 3교시 등 수업시간, 점심시간, 청소시간, 자율학습시간, 현장체험학습시간…. 학생과 교사가 만나는 공간은 일상으로 둘러싸여 주인을 잃어버린다. 잠시 판단을 유예하고 지긋이 눈을 감고 교실 모습을 상기해 보면 교사는 교탁위에 있고 아이들은 정해진 자리에 항상 앉아서 공부하고 청소도구함은 항상 늘 그렇고, 교실 앞뒤 게시판 또한 그렇다.
학생들은 시대를 주도한다. 아니 앞서간다. 자신의 주장을 떳떳하게 이야기하고 전자매체가 주는 이로운 점들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활용한다.[PAGE BREAK]게다가 사회가 갖는 통념을 흔들어 일상에 파격을 준다. 자유분방하며 끼로 둘러싸인 학생들을 일상으로 둘러싸인 교실 속에 묶어 놓고 상징적인 폭력(Symbolic violence)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학생 개개인의 끼를 발산할 수 있는 교실 속 새롭게 보기가 절실히 필요하다.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다
천수만에는 무수한 철새들이 왔다가 간다. 환경의 변화를 느끼며 철새는 환경에 적응하고자 자신의 둥지조차 옮겨가며 삶을 살아간다. 변화는 새로운 모습을 창출할 수 있는 힘을 내포한다. 천수만에는 무수한 새떼들이 있다. 먼발치에서 새떼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북받쳐 오른다. 물위에 앉는 새, 날아오르는 새 그야말로 혼돈의 장관이다. 울어대는 소리와 이리저리 자신의 길을 찾아 날아오르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사방을 향해 날으며 질러대는 장관은 무질서의 극치이다. 하지만 유심히 관심을 갖고 새떼의 상태를 보면 그들 내부에는 고도의 정교한 질서가 존재한다. 진정 무질서한 상태라 가정하면 서로가 부딪쳐 죽어 떨어지는 새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수한 새떼가 앉았다 사라진 자리에는 부딪쳐 떨어진 새는 없다. 분별없는 혼돈은 변화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는 원동력이다.
산업사회의 단선적인 사고 방식은 탈근대사회의 다원화된 사회를 뛰어 넘지 못한다. 급격한 사회의 흐름은 사회속 개개인의 생각, 행동에 깊은 영향을 준다. 사회에 속한 개개인은 사회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뒤따르거나 아니면 그대로 정지한다. 교실 속에는 산업사회의 기운과 탈근대사회의 기가 혼재한다. 서로의 기싸움은 팽팽하여 양보할 줄을 모른다. 그러한 모습을 본 주변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맘으로 교실붕괴니 학교붕괴라는 말로 결론을 내린다. 교실 속 혼돈은 각자 나름의 이유 있는 질서를 내포하며 갈등과 분화 속에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 자는 아이들, 떠드는 아이들, 우왕좌왕하는 혼돈의 교실 분위기 속에서 용솟음치는 변화와 혁신의 에너지를 느껴보자. 교사와 학생 간에 느껴지는 에너지는 없는가? 교사와 학생 간에 존재하는 혼돈상태는 무엇인가? 혼돈이 없으면 자연스러운 것이요! 혼돈이 있다해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교실은 존재하고 그 속에 있는 학생과 교사 또한 존재한다. 일정한 통과의례(pass ritual)처럼 학생들은 교실을 거쳐 사회로 나아간다.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이 존재하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교실붕괴니 학교붕괴라는 말을 버리고 교실 속 일상의 틀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눈을 돌려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서로가 갖는 ‘코드(code)’는 일상의 틀과 같이 균일한가? 무수하게 다원화된 학생의 코드는 혼돈을 일으키며 변화와 혁신을 요구한다. 교실은 천수만의 새떼이다. 교실 속 혼돈을 이해하고자 시나리오 ‘자동인형의 원맨쇼’를 제시한다.
하나의 예시자료로서 교실 속 혼돈을 단순화시킬 수 있는 우를 범할 수 있으나 가만히 생각해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보아 제시해 본다. 교실은 교육주체 공동의 장이다. 서로가 대화와 협상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 다음의 시나리오를 보고 실제로 모둠별로 학생들을 편성하고 역할극을 만들어 시연해 본 후 각자 참가자로서, 상대배역으로서, 타 역할극 관객으로서 소감을 나누어 보면 각각이 느껴지는 의미가 색다를 것이다. 서로 엇갈리는 일상의 혼돈을 역할극으로서 떨어져 새롭게 보고 논의해 본다면 새로운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교실 속 위기를 넘어 웃음꽃 피어나고, 행복이 충만한 아름다운 교실을 만들어야 한다. 쌓고 비축해 놓은 변화의 힘은 천수만의 새떼처럼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다. 무질서의 증가는 엔트로피를 증가시켜 새롭고 안정된 상태로 회귀한다. 교실 속 혼돈은 ‘틀린 관점’이 아니라 ‘다른 관점’이다. 옳고 그름의 이중 잣대로 판단하기보다는 다양한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혼돈은 새로움으로 바뀌고 그 새로움은 변화를 재현한다. 끊임없는 새로움의 연속이다.[PAGE BREAK]교실에서 마음의 끈 연결하기
T.S. Eliot(1888~1965)는 황무지(The Waste Land, 1922)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겨울잠을 자는 황무지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고통스러운 달이 아닐 수 없다. 4월은 만물이 소생하는 활력의 달이자, 꿈틀거림의 달이다. 한해의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세상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는 의미로울지 모르나 조용히 잠을 자려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귀찮은 존재로 다가온다. 그래서 잠자려는 사람들에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될 수 있다. 일상을 새롭게 보기 위해서는 황무지로부터 벗어나 조용히 가슴속 내면에서 잠자고 있는 활력을 깨워야 한다. 공교육의 내실화를 강조한다. 공교육의 내실화는 4월의 절정위기(critical crisis)를 넘어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루어진다.
누구나 일상을 통해 습관을 갖고 그 습관으로 인해 인생이 결정된다. 일상의 틀로 인해 스스로 황무지 사람이 되고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내면을 성찰해 보자. 환경의 변화는 사람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마음속 가치를 변화시킨다. 하지만 환경을 바꾸어 주었다고 공부를 거부한 학생이 공부에 즐겁게 참여하고 삶의 의욕을 가질 것인가? 거꾸로 뒤집어 보기를 하면 또 다른 세계에 진입한다. 인간 내면에 있는 영적인 신념체계(Spritial Belief System)부터 바꾸어 놓으면 다음으로 개인의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그러면 삶의 인생경로가 바뀔 것이다. 물가에 말을 끌고 갈 수는 있으되 물을 먹는 것은 말이다. 공부를 하고 학습에 참여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인의 신념체계가 중요한 요인이다.
교실 속 혼돈은 각자가 갖고 있는 내면의 신념체계가 서로 충돌하며 다른 가치관을 창출한다. 만일 각자가 갖는 신념체계를 서로 연결하여 연대한다면 충돌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교사는 학생의 마음속으로 들어가고 학생은 교사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중요한 타인(Significant others)이 된다. 역지사지의 기법을 적용한다. 타인의 행동은 모두 내안으로부터 비롯되고 내안을 먼저 정화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다. 흔히 사건의 귀인을 타인 속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교실 속 혼돈상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 혼돈은 학생들만의 몫인가? 내 내면의 신념을 새롭게 보는 눈을 갖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 무질서를 질서로 만드는 주요한 원동력이다.
개개인의 신념체계에 변화를 주고 개인의 변화를 꾀한 상태에서 이번에는 마음의 끈을 연결해 본다. 떨어져 있는 듯하나 하나인 마음! 마음의 끈을 이으면 상대가 새롭고 소중한 존재로 다가온다. 하다못해 못쓰게 되어 버린 쓰레기도 우리에게 있어 필요한 존재이다. 일상의 틀에 갇혀 주변 만물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 주변을 들러 보자. 책상, 의자, 책, 칠판, 지우게, 교탁, 가방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운 존재들이다. 세상 만물이 이렇게 고마울 진데 사람이야 더욱 말을 해서 무엇하랴?
교사는 학생이 있어 소중하고 학생은 교사가 있어 더욱 소중하다. 소중한 존재에게 감사하며 더욱 애정을 갖는다면 자연스럽게 끊어진 마음의 끈은 연결되고 사라진 마음의 끈 또한 새롭게 만들어 질 것이다.
학생 개개인의 장점을 발견하자
교실은 사회의 축소판이다. 사회가 급격하게 변한다면 교실 또한 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변화를 일상의 틀로 묶어 놓고 황무지처럼 제자리걸음만 한다면 혼돈만 지속될 뿐 새로운 질서는 창출되지 않는다. 교육은 마음의 끈을 연결하는 작업이다. 콩나물 교실 속의 개별화는 마음의 끈을 통해 이루어진다. 누구나 장점은 있다. 학생 개개인이 갖는 장점을 한 번 나열해 보는 연습을 해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미처 보지 못했던 상대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채운다면 교실 속 위기는 행복으로 가득 차고 항상 웃음꽃 피는 사계절이 될 것이다.
잠시! 눈을 감고 주변의 감사함을 느끼고 나를 성찰해 보자. 그런 후 나의 행복감으로 세상을 물들여 보자. 그러면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교사의 행복은 학생의 행복이요! 학생의 기쁨은 교사의 기쁨이라! 서로의 감사함으로 인해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PAGE BREAK] 시나리오 ‘자동인형 원맨쇼’ # 한 중학교 교장실
(한 학생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교장실에 들어온다)
학생 : 교장 선생님, 드릴 말이 있습니다.
교장: 그래, 무슨 일이니?
학생 : 제 러브레터를 보여주지 않는다고 선생님이 저를 때를 수 있어요?
교장 :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초지종을 말해라.
학생 : 수업 중에 러브레터를 썼다고 과학 선생님께서 다가오시더니 “내 놔!” 하시잖아요. 그래서 쓰고 있던 러브레터를 책상 밑에 오히려 집어넣었죠. 그랬더니 “이 자식, 이리 안 낼 거야?” 막무가내로 윽박질러요. 수업을 중단하고 “따라 와!” 하고서는 학생부로 부르시더니 선생님 말을 안 듣는다고, 들고 있었던 매로 엉덩이를 때렸어요.
교장 : 그래? 선생님 말씀도 들어보아야 하겠구나.
(전화하는 교장, 과학선생님을 부른다. 머쓱한 표정으로 과학 선생님이 들어오신다.)
교장 : 어떤 일이십니까?
교사: 수업을 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처음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잠자다가, 이어서 종이를 꺼내놓고 뭔가 쓰고 있었어요. 그래서 화가 나서 “이리 내”라고 했는데, 거의 덤빌 듯한 모습으로 “이건 제 것인데 왜 내놓으라는 거냐?”고 대들더군요.
학생 : 그것은 제 편지잖아요.
교사 : 수업을 듣지 않았잖아요! “교장선생님! 얘들 앞에서 반항하는 녀석을 그대로 둘 수 없어 학생부에 불러서 수업태도가 뭐냐. 선생님이 내라면 내는 것이지, 왜 말이 많냐.”고 했더니 거의 눈을 부라리며 “왜요?”라고 말해요. 버릇없이 “왜요?”가 뭐예요. 그래서 화가 나서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이튿날, 학부모가 학생을 데리고 교장실로 들어온다. 잔뜩 화가 난 투다)
학부모 : (다짜고짜로, 아이 매자국을 보이며) 왜, 우리 애를 때리는 거예욧! 이게 뭐예요?
교장 : 앉아서 이야기합시다.(교장선생님, 과학선생님을 부른다)
교사 : 죄송합니다. 이렇게 매자국이 생긴 줄은 몰랐네요.
학부모 : 선생님이 이리 쉽게 사과를 하니 참겠어요.
교장 : 영수야 너는 미래의 희망이 게임 작가가 되는 것이라서 글쓰기 이외에는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는데,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한 가지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앞으로는 ‘웹 마스터’, ‘웹 프로그래머’, ‘프로게이머’, ‘플랫폼 디렉터’ 등 이런 직종이 유망 직종이라고 하는데, 이런 일들이 어디 관심 있는 한 가지 공부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일들이라 생각하니? 제발 부탁인데 수업에서의 매너 좀 지키자. 남을 배려하고 살자. 참고 열심히 듣다 보면 다 도움이 되는 일이란다.
영수 : 학교는 숨막히는 지루함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어떠한 변화도 없습니다. 같은 일상이 반복될 뿐입니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이나 개인활동은 철저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가만 있어라.’ ‘참아라’, ‘조용히 해라.’ ‘시키는 대로 해라.’ ‘대학갈 때까지만 기다려라.’ 등등으로 철저하게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저는 자동인형 같습니다. 학교가 과연 이래야 하는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