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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래 그런 놈이에요"

요즘은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사람[人性]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나는 느낌이다.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도무지 사람 될 것 같지 않은 못된 행태에 매섭게 나무라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학교라는 곳이 사람을 가르치고 기르는 곳이기에, 또 명색이 선생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훈계를 하고 야단을 치면, 불만과 못마땅함으로 “나 원래 그런 놈이에요” 하고 들이댄다.


  어른이나 아이나 도무지 사람 될 것 같지 않은 못된 행태를 보이면, 당장 협기를 동원하여 매섭게 나무라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성정(性情)이 거칠고 양심 없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 하는 짓이 고약하여 선량한 이웃을 건드리고, 찍찍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서 늘 문제거리를 만들고 다니는 사람들, 어디든 그런 족속이 있게 마련이다. 생각 같아서는 불러서 혼꾸멍내 주고 싶은데, 세상이 워낙 험하여 무슨 행패를 어떻게 겪을지 몰라서 억지로 참고 있으려면 마침내 분(憤)하고 노(怒)한 마음이 되어 버린다.
   정도 차이가 있기는 해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다 보면, 이런 경우가 심심치 않게 생긴다. 요즘은 초등학생에서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사람[人性]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나는 느낌이다. 그래도 학교라는 곳이 사람을 가르치고 기르는 곳이기에, 또 명색이 선생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불러서 훈계를 하고 야단을 치면, 요즘 아이들, 불쑥 침 뱉듯이 내뱉는 말이 있다.
  “나 원래 그런 놈이에요.”
  불만과 못마땅함의 표정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인 채 들이대는 말이다. 훈계를 하는 쪽에서 듣기로는 기가 차는 말이다. 그런데 녀석의 못된 행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 원래 그런 놈이오’하는 말과 꼭 짝을 이루어서 다니는 말이 잇달아서 나온다.
  “상관 마세요.”
  그러고는 아까 했던 말을 억양을 높여서 한 번 더 반복한다. 이를테면 강조법인 셈이다.
  “나 원래 그런 놈이라니깐요.”
  이쯤 되면 어찌 더 해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당장 손이 올라가는 것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기는 해도 뾰족 묘수가 없다.
  “그래 너 같은 녀석을 데리고 말을 하는 내가 바보지. 아무튼 어디서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그건 네 마음대로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 앞에서는 절대로 안 돼. 알았어?”
  이렇게 처리하고 대충 쫓아버리려고 해도 훈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한 것 같지 않다. 그러다 보면 스스로의 자존도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씁쓸하다.
  이쯤에서 필자가 아는 어떤 선생님의 경험담 하나가 생각난다. 새 학년이 된 선생님의 반에 그런 돼먹지 않은 아이가 하나 있었더란다. 영철이라는 아이가 첫날부터 제멋대로 못된 행동을 하기에 불러 야단을 쳤다. 그 녀석이 짜증 섞인 톤으로 대꾸를 해 왔다.
  “선생님, 나 원래 그런 놈이라니깐요. 상관 마세요!”
  선생님은 녀석과의 장기전을 각오했다. 그리고는 그 녀석을 데리고 둘만이 있을 수 있는 조용한 방으로 갔단다. “영철아! 네가 무얼 잘못한지 알겠니?”하고 물었지만 녀석이 대답을 성의 있게 해올 리 만무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선생님은 “나도 너에게 보여 줄 것이 있다.”고 말했다. 녀석이 눈길을 돌려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선생님은 그 녀석을 향하여 도저히 선생님 같지 않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단다. 말도 교양 없이 하고, 마치 양아치처럼 그 녀석을 툭툭 건드리기도 하고, 행동도 꼭 실성한 사람처럼 하고, 상식 없는 사람처럼 굴기 시작했다. 불량배처럼 굴면서 거칠고 상스런 투로 녀석에게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리고는 선생님 스스로 자학하는 듯한 투로 말을 해 보기도 하다가, 녀석을 거칠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기를 한참. 녀석이 참고 참다가 버럭 소리를 질러 한 마디 했다.
  “선생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선생님답지 않게!”
  “박영철! 나 원래 그런 놈이야! 네깐 놈이 상관할 거 없어! 나 원래 이런 놈이라니깐. 근데 너 오늘 나한테 죽었다. 원래 그런 놈들끼리 한번 붙어 보자.”
  이렇게 시작한 선생님의 지도법은, 다양한 교육적 시도를 하면서, 두 달 이상 지속되었고, 영철이에게 입버릇처럼 따라다니던 말, ‘나 원래 그런 놈이에요’라는 말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나 원래 그런 놈이야’라는 의식의 상대되는 자리에 놓인 의식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의식일 것이다. 표현 그대로도 서로 상대적인 표현이고, 내포하는 의미도 정반대의 뜻을 드러낸다. ‘나 원래 그런 놈이야’라는 의식은 내가 나를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했을 때 나오는 말이다. 나도 나를 잘 대접하겠다는 의지가 사라진 심리가 반영된 말이다. 흔히 하는 말로 자존감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언어이다. 자기 자신이 막가파식으로 막 가게 되는 것을 방치하는 심리적 상태이다.
  반면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의식은 무너지고 추락하려는 자기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위로 끌어올리려는 의식이 반영된 말이다. 자기 자신을 도저히 그렇게 부끄럽고 형편없는 존재로 둘 수 없다는 의식, 그것은 내 자존심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는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언어가 바로 ‘나 그런 사람 아니야’이다. 나라는 사람이 귀한 존재이고, 가치 있는 존재이고, 나 스스로도 그런 나를 소중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때,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프로이트는 일찍이 사람의 본성적 의식 가운데 ‘자신을 살리려는 의식’과 ‘자신을 죽이려는 의식’이 함께 있다고 보았다. 신학자들은 전자를 두고 인간에 관여하는 선한 신[善神]의 의지로 설명하기도 하고, 후자를 두고 악한 신[惡神]의 의지로 설명하기도 한다.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의식은 선신의 의지에 감응하는 인간 정신이고, ‘나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는 의식은 악마의 조종에 지배를 받는 인간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단순한 이분법이라 위험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사람은 자존감을 먹고 그가 살아가는 에너지를 충전하는 존재라는 점, 인간은 자존감과 더불어 높게 아름답게 고양되는 정신적 존재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하니 ‘나 원래 그런 놈이야’라는 의식이 인간을 얼마나 파탄시키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자존감은 어디서 오는가.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것일까. 그것은 남으로부터 존중을 받아 보는 데서 오는 것이다. 존중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남을 존중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그윽한 삶의 향기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물론 내가 아무것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데 상대가 무조건적인 존중감을 부여하는가. 설령 그렇다고 치더라도 언제까지 상대의 너그러운 동정심에 의탁하여서만 나의 존중됨을 확인할 것인가. 스스로 자존감을 기르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특단의 조치나 전략을 통해서 강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식과 앎’이 한 인간의 자존감을 서서히, 그러나 굳건하게 형성시켜 준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무언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생각과 판단의 준거를 더 많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런 지식 때문에, 바로 그 아는 것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려다가도 되돌아보게 된다. 배운 사람이 다르다. 몰랐을 때는 용감했었는데 알고 나니까 함부로 못하겠더라.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듯이 배운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모두 지식이 우리 안에서 깊숙이 인격으로 작용하는 모습들이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라고 하면, 그런 교육은 무조건 문제가 있다는 표정을 띠는 사람들이 있다. 지식교육은 으레 주입식 일방적 전달의 교육이고, 그런 교육은 구태를 벗지 못한 것이라 하여, 용도폐기된 쓰레기 취급을 한다. 교육을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그러하다. 알고 보면 이런 인식 역시 상투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물음을 다시 진지하게 던져 보아야 한다. 지식을 왜 가르치는가. 우리는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쳤는가. 지식교육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가. 당장 써 먹기 위해서 가르치는 지식(엄밀히 말하면 정보에 해당하는)은 일회용 반창고처럼 다루어지고 또 버려진다. 지식을 그런 모양새로 가르쳤기 때문에 지식과 인격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되어 버렸다. 하지만 지식은 인격으로 발효되는 재료이다. 지식 자체가 소중하다는 인식의 교육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때까지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 왔는지를 반성할 일이지, 지식 자체를 타박할 일은 아니다. ‘나 원래 그런 놈이야’이었던 사람을 ‘나 그런 사람 아니야’의 상태로 길러주기 위해서 학교는 지식교육의 새 장을 열어야 한다.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꼼꼼하게 읽었다. 베스트셀러라는 세속의 명예를 의식하지 않고, 이 작품 자체에 진지하게 다가가도록 책을 한번 손에 들고 다 읽을 때까지 불필요한 휴지(休止)를 두지 않고 읽으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만사 제치고 몰입하여 책에만 홀딱 빠져서 읽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이렇게 된 이즈음에는 소설 이야기와 사는 일상을 적절히 동반시키는 모양새를 취한다. 지금 필자가 읽고 있는 소설의 내용을 일상에 그윽하게 대조하면서, 소설 이야기가 일상의 현장성에서 어떤 감응과 상상력을 불러 오는지를 은근히 맛보려 했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 필자는 ‘나 원래 그런 놈이야’이었던 주인공이 ‘나 그런 사람 아니야.’로 변해 가는 매우 순정하고도 내밀한 과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외면으로 ‘나 원래 그런 놈이야’를 표방하는 인간들의 내적 상처와 불안과 아픔을 들여다보는 과정이 내게는 참으로 아프고 눈물겨웠다. 주책없이 책을 보다가 아무데서나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거꾸로 멀쩡하게 ‘나 그런 사람 아니야’를 선언하면서도 ‘나 원래 그런 놈이야’의 원죄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아프기는 매한가지이었다. 

  그러니 다시 ‘말’에 대해서 생각이 머문다. 어떤 말이든, 표현 그 자체이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 말을 사용하는 맥락에 영향을 받아서 교묘하게 변한다. ‘나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말은 우리들 각자의 내부의 언어로서 있을 때가 가장 진정되고 바람직하다. ‘나 그런 사람 아니야’를 너무 밖으로 자주 노출시키면 이것은 자칫 과시용 내지는 위장용 언어로 타락할 가능성이 많다.
지식인들 그러하지 않을까. 그것을 가르치는 맥락에 따라서 지식이 곧 ‘자존감’을 기르는 인성의 질료가 되기도 하고, 지식이 곧 물신(物神)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르치는 이의 철학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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