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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겠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덩치 큰 고래도 칭찬 한 마디에 긍정적으로 변화하여 춤을 추는데, 하물며 사람에게야 칭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칭찬의 효력을 이렇게 강조하는 데에는 우리네 현실이 칭찬에 인색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또 그만큼 칭찬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나무람과 꾸짖음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찬의 교육학이 위세를 얻고 있다. 인격에 대한 인식이 성숙할수록 칭찬의 교육적 가치는 확장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렇게 덩치 큰 고래도 칭찬 한 마디에 긍정적으로 변화하여 춤을 추는데,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야 칭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할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칭찬의 효력을 이렇게 강조하는 데에는 우리네 현실이 그만큼 칭찬에 인색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또 그만큼 칭찬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나무람과 꾸짖음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스스로 돌아보건대 나는 학생들에게 칭찬을 많이 해 주는 편이다. 교사를 기르는 대학에서 선생을 하려면 ‘교사되기의 원리’를 교수가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요컨대 나는 칭찬에 후한 사람이다.
그런데 드물기는 하지만, 아주 가끔은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학생에게 의미 있는 꾸지람을 해 주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꾸지람을 앞두고서는 몇 번씩 머뭇거리는 편이다. ‘아, 저 학생이 내 꾸지람을 정말 멋있게 수용해 주었으면 참 좋을 텐데. 혹시라도 내 진정한 마음은 전달되지 않고 상처로만 남게 되면, 이 꾸중은 안 하기만 못한 것 아닐까’하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런 머뭇거림이 길어질수록 나의 꾸중 계획은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달라진 세태를 의식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마음으로 충고하여 꾸중하기가 정말로 어려워졌다는 것을 실감한다. 꾸중은 악덕이고 칭찬은 미덕이라는 단세포적인 이분법이 어느새 우리들 인식에 타성처럼 자리 잡았다. 꾸중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꾸중은 본래의 의도한 효과와는 천리만리 먼 역효과의 길을 간다. 그리고 그 역효과의 상흔은 오히려 꾸중한 쪽에게도 오래 남겨진다. 제대로 된 진정성 넘치는 꾸중을 접해 본 경험이 아예 사라지고 있다. 꾸중의 방식이 문제가 될지언정, 그렇다고 꾸중 자체의 교육적 책무를 아주 무시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칭찬의 교육적 위력을 진정으로 높이기 위해서라도 꾸중의 길은 그것대로 바르게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쯤에서 칭찬과 꾸지람의 위상(位相) 관계를 생각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칭찬과 꾸지람은 이 지구상에서 선생 노릇 하는 사람 모두에게 숙명적 실천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칭찬의 교육학’이 중요하면 할수록 ‘꾸지람의 교육학’ 또한 마땅한 자기 자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칭찬과 꾸지람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유기적 상호성을 가지는 것이다.
칭찬만 있는 세상에 칭찬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마치 빛만 있는 세상과도 같다. 빛만 있는 세상이란 사실 피곤한 세상이다. 빛은 끝없는 시지각의 작동을 요구하여, 오로지 보고, 보고, 또 보게 할 뿐, 그 막막한 밝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쉬지 못할 것이다. 빛만 있는 세상일수록 오히려 사람들은 눈을 감고 만상을 어둠 속에서 놓아 버리는 명상의 시공(時空)과 지각의 안식을 가지려고 애를 쓸 것이다. 빛이란 어둠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난다. 칭찬 또한 꾸중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난다.
칭찬만 있는 세상에서는 칭찬이 걷잡을 수 없이 인플레 될 것이다. 인플레 된 칭찬이란 이미 번다한 비위 맞추기이거나 임시방편의 안심시키기로 왜곡되기 쉽다. 이런 변질된 칭찬의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가 가지게 될 ‘말에 대한 불신’은 생각만 해도 두렵다. 그것이 어찌 말에 대한 불신만으로 끝날 일인가. 필경에는 사람에 대한 불신, 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꾸중의 철학 없이 막무가내 칭찬으로 나서는 것은 자칫 ‘주책없는 어른’을 자처하는 꼴이 될 수 있다.
인생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섭렵한 사람을 두고 우리는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맛본 사람’이라고 말한다. 단맛만 가지고 인생의 경륜을 쌓을 수 없고, 쓴맛만 가지고도 인생의 경륜을 쌓을 수 없다. 교육을 받고 자라는 쪽에서도 그 성숙의 총체적 발달을 위해서는 단맛과 쓴맛이 모두 필요한 것이다. 빛과 어둠의 순환이 만물의 생장을 주관하는 우주의 리듬이듯이, 칭찬과 꾸중 또한 한 인간의 성숙과 발달을 도모하는 상보적(相補的) 기제이다. 적어도 교육하는 행위의 총체성 속에 칭찬과 꾸중은 조화로운 동반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우(畏友) W교수의 연구실을 오랜 만에 들렸다. 추운 날이었다. W교수가 만들어 주는 차 한 잔을 마시며 환담하는 동안, 누가 연구실 문을 두드린다. 20대 중반의, 선생인 듯 학생인 듯한 여성이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인사의 투로 보아 W교수의 제자인 듯하다. W교수가 제자를 소개하여 내게 인사시킨다. 이번 봄 새 학기에 대학원 석사과정에 들어 올 학생이란다. 학생이기도 하거니와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라고도 한다. 현장 3년차의 선생님이라니 신참 교사는 지난 셈이다.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이렇게 본격적 공부를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있으니 참으로 장하다고, 나는 그녀에게 격려의 말을 한다.
신입제자를 자리에 앉힌 W교수는 제자의 공부에 대한 포부와 각오를 확인한다. 상대의 잘못된 학문 방식과 습관이 보이면 서슴없이 나무란다. 학문적 노력과 논문쓰기 과정의 엄밀성을 강조하면서, 제자의 준비 상태를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미흡하거나 부족하면 또 따끔하게 일침을 놓는다. 젊은 제자는 선생의 나무람이 있을 때마다 입을 굳게 다문다.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굳히는 것인지, 마음이 상하여 면구스러워지는 것을 다스리기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W교수는 학문의 길을 같이 가는 동학의 친구들과 왕성하게 교유하기를 강조하면서, 앞으로도 쓴 소리를 많이 할 것이니 그리 알라고 한다. 간간 웃음을 띠며 이야기했지만 분명 W교수의 말은 나무람과 교정의 메시지에 가까운 것이었다. 나만 이야기했으니 자네의 말도 들어 보기로 하세. W교수가 말할 기회를 제자에게 넘겨준다.
그녀는 수그린 이마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 W교수를 향하여 다시 한 번 가벼운 목례를 한다. 비로소 굳게 다물었던 입가의 근육을 풀고 가볍게 웃음을 머금는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두고서는 이렇게 말을 한다.
“상처받지 않겠습니다.”
이 첫마디가 내게는 신선하고도 산뜻한 미더움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녀가 강하고 알차게 그리고 너그럽게 성장, 발전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학문의 길에서 자기연마를 하려는 사람의 다짐으로서 저처럼 견고하기도 쉽지 않으리라. 아울러 스승에 대한 신뢰를 저처럼 확고하게 보여주는 말이 달리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논어>에는 공자가 제자들과 문답하며, 제자들의 모자람을 일깨우는 장면이 나온다. 그 일깨움의 대목을 꼭 꾸지람이라고 하기에는 무엇하지만, 그것이 칭찬의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닌 것만큼은 틀림없다. 공자의 제자들이 그렇게 꾸중 받는 자리에서 무어라 반응을 했는지 묘사돼 있지 않지만, 문맥의 큰 흐름으로 보면, 스승의 나무람을 가르침의 본질로 받들어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공자의 언행을 <논어>로 기록하면서 그런 나무람의 장면들을 수록하지 않았겠는가.
신약성서에도 예수가 제자들을 꾸짖는 대목이 더러더러 나온다. 그러나 그 꾸중을 들은 제자들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는 기록은 없다. 성서 역시 예수가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 이후 예수의 제자들이 기록한 책이다. 예수의 꾸중을 제자들이 잊지 않고 굳이 의미 있게 기록한 것은 그 꾸중의 본질과 가치를 존중하고 감사히 여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문득 유도를 배우던 시절의 사범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유도의 연습과정에서는 상대가 공격을 걸어오면 무리하게 피하려 하지 말고 그 공격에 선선히 넘어가 주라.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래야 다치지 않는다. 그래야만 실력이 발전할 수 있다. 단 연습할 때만 그러하다. 경기에 나가서는 그리하면 안 된다.”
꾸중이란 유도 연습에서 내게 가해오는 공격에 해당하는 것일 수 있다. 공격 자체를 거부하면 유도의 기량을 기를 수 없다. 공격의 리듬에 잘 호응하여 나를 매트 위에 떨어지게 만드는 과정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유도의 기술에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꾸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자리가 있는 사람이 발전한다는 뜻 아니겠는가.

꾸중이 사라져 가는 세태에는 상처의 과잉이 나타난다. 그만큼 눈에 안 보이는 학대가 심해지는 세상이라는 것일까. 우리 사는 세태가 얼마나 삭막해졌는지 사람들은 마치 언제라도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그래서 조금의 꾸지람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우리들 존재는 더욱 허약해지고 우리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는 것 아닐까.
스스로의 강함을 위하여, 세상을 향한 너그러움을 위하여, 마음에 심어두고 주문처럼 되뇌어 보자.
‘상처받지 않겠습니다!’| 경인교대 교수
칭찬과 꾸지람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유기적 상호성을 가진다. 칭찬만 있는 세상은 마치 빛만 있는 세상과도 같다. 빛만 있는 세상이란 사실 피곤한 세상이다. 빛은 끝없는 시지각의 작동을 요구하고, 그 밝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쉬지 못할 것이다. 빛만 있는 세상일수록 오히려 사람들은 눈을 감고 만상을 어둠 속에서 놓아 버리는 명상의 시공(時空)과 지각의 안식을 가지려고 애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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