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군대는 자국의 항구들을 공격하고 양쯔강에 진입한 후 전장(鎭江)을 점령해 남북을 차단한 다음 난징으로 육박하던 영국군을 결국 격퇴시켜 중국이 종이호랑이가 아님을 과시했다.” 물론 뒤집은 이야기이다. 청은 잘 훈련되고 근대적 병기로 무장한 영국군에 무릎을 꿇었고,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은 빗장이 풀린 중국으로 물밀듯이 들어가 각종 이권을 탈취해갔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듯이 아편(앵속, 양귀비)의 수입․판매․흡연을 금지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한 청은 1839년 6월에 임칙서(林則徐)를 특명전권대신으로 꽝조우(광주)에 파견해 영국 상인의 아편 2만 상자를 몰수해 불태우고 영국과의 통상을 단절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국과의 무역확대를 꾀하던 영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고, 영국은 결국 다음해 6월 청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19세기 전후의 중국은 아편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는 물론 국민건강상으로도 심각한 폐해를 입고 있었다. 기원전 34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처음 재배된 것으로 전해지는 아편은 서아시아와 이집트를 거쳐 유럽과 인도로 전래되었으며 중국에는 아랍상인들에 의해 서기 400년에 전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늦어도 당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아편은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약으로 분류되었고, 약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이후 아편은 합법적으로 수입될 수 있었다.
중국에서 아편을 처음으로 흡입한 지역은 타이완이었던 것 같다. 타이완 주민들은 약으로 분류된 이후 곧 아편을 연초에 섞어 흡입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편 흡입은 인도항로를 처음으로 개척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1500년경에 처음 시작했으며 아편을 약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1600년경의 네덜란드인들이라고 한다.
아편전쟁이 어떤 연유로 일어났는지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영국은 18세기에 들어와 동인도회사 등을 통해 청과 활발하게 교역했다. 하지만 건륭제 전후에 번영을 구가하던 청과의 무역에서 영국은 심각한 무역적자에 시달렸다. 물론 영국은 중국의 문호를 보다 완전하게 개방시켜 무역역조를 해소시키려고 애썼다. 1793년에 G. 메카트니경을 중국에 파견하고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파견해 무역제한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청나라로부터 번번이 거절당했다.
영국산 모직물과 인도의 면화를 중국에 수출하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차(茶)와 비단 등을 수입했지만 지나친 수입초과로 청에 막대한 은을 지불해야 했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수입초과 상태를 역전시키기 위해 인도산 아편의 중국수출이라는 묘책을 찾아냈다. 그리하여 동인도회사는 모직물 등 영국 상품은 인도로 수출되고, 인도의 아편은 중국으로, 중국의 차와 비단은 영국으로 수송되는 이른바 삼각무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영국과 중국의 교역상황이 바뀌었다. 아편수출 덕분에 영국은 1820년대부터 무역흑자를 누리기 시작했고 반대로 중국은 막대한 은(銀)이 아편대금으로 유출되어 곧 심각한 경제위기를 맞게 되었다. 더욱이 1834년부터 동인도회사의 무역독점권이 폐지되면서 영국의 상인들은 다투어 중국의 아편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인도산 아편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확실한 수치는 아니지만 합법적, 비합법적으로 중국에 유입된 아편은 1800년에는 4750 상자, 1826년에는 1만 9386 상자. 1830년에는 3만 3906 상자, 아편전쟁 직전인 1839년에는 5만 350 상자로 추산된다. 아편수입에 비례해 중국의 은이 점점 더 많이 유출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 동안 약 6억 양(兩)의 은이 영국계 상인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은의 지나친 유출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조세제도까지 위협했다. 은이 귀해져 은과 동전의 교환비율이 1:800에서 1:1,500 내지 1: 2000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무제한의 아편수입은 국가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국민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임칙서는 그 무렵의 중국인 아편흡연자를 400만으로 추정했지만 적어도 200만은 넘었을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처음에는 주로 상류 부유층이 아편흡연을 즐겼으나 아편흡연 관행은 점차 중․하류층으로 확산되어 갔다. 아편흡연 시중꾼을 두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의 다방처럼 여기저기에 아편흡연방들도 생겨났다.

중국대륙이 아편연기로 뒤덮여 가면 갈수록 국민경제와 국민건강 또한 더욱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아편의 심각한 피해를 막기 위해 청왕조는 때늦게 노력했으나 백약이 무효였다. 관리들이 부패한 데다 중국적 향락문화와 명나라 말기부터의 긴 역사를 자랑하는 흡연풍조가 결합해 아편흡연을 부추겼다. 거기다 영국 상인만이 아니라 천지회․첨도회 같은 중국계 비밀결사들까지 다투어 아편밀수에 나서는 형편이었다. “그 냄새가 향기롭고, 그 맛이 맑고 달며, 기분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 마주보고 교대로 흡연하면 처음엔 정신이 밝아지고 머리와 눈이 깨끗해지며, 계속하면 가슴이 갑자기 확 열리면서 감흥이 두 배로 증가한다. 오래도록 하면, 골절이 나른해지고, 두 눈동자가 확 열리고 만 가지 생각이 모두 없어지고 꿈속에서 노니는 것 같으며 영혼이 상쾌해지니 진정한 극락세계다”는 식의 아편예찬 시(詩)들도 등장했다.
비상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던 청나라는 임칙서를 꽝조우로 파견했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해 태우고 영국인의 대(對)중국 교역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전쟁을 통해서라도 중국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무역확대를 도모하려던 영국에게 전쟁의 구실을 주었을 뿐이었다. 사실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영국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기회를 잡았던 것이다.
1840년 2월에 중국원정을 결정한 영국은 해군소장 G. 엘리어트를 최고 행정관 겸 전권대사로 중국에 파견했다. 같은 해 6월에 홍콩에 도달한 영국함대는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페이강 하구를 향해 북진했으나 양측은 어떤 합의점도 찾지 못했다, 다음해 5월 영국은 꽝조우시 성벽을 공격해 배상금 6백만 달러를 받아냈으나, 이어 꽝조우시도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승산 없는 영국과의 전쟁을 시작하는 것일 뿐이었다.
청조는 강력한 영국 해군에 대항할 어떤 무기도 없었고 효과적 전략도 세우지 못했다. 청이 할 수 있는 대응은 고작 영국 함대를 향해 불붙은 뗏목을 밀어붙여 보복하거나 상금을 걸어 영국군의 머리를 베어오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제국기(旗) 군단’은 때로는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근대적 영국군에 비해 무장과 훈련이 크게 부족했다. ‘청기(靑旗)군단‘도 그와 유사하게 허약한데다 사기도 높지 못했다. 청은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지방의 군대를 긴급히 투입했으나 그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영국은 자국의 목표가 중국인에게 고통을 주는 관료 및 군인과 싸우는 것일 뿐 인민과 싸우는 것이 아님을 중국인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중국인과 정부 사이에는 심각한 불신과 갈등이 존재했고 전쟁의 혼란 중에 더욱 현저해진 그 불신과 갈등을 영국은 적절히 이용할 수 있었다.
엘리어트의 후임 사령관으로 8월에 마카오에 부임한 H. 포팅어는 아모이와 닝뽀 등을 점령하면서 북진했다. 인도 주둔 영국군으로부터 증원군을 얻은 포팅어는 1842년 5월에 작전을 재개해 상하이의 관문 우쑹과 상하이를 점령했다. 이어 양쯔강에 진입해 전장을 점령해 남북을 차단한 다음 난징으로 육박했다. 8월에 난징이 함락되자 청은 결국 굴복하여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청정부는 1842년 8월에 난징조약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관허(官許)상인으로 대외교역을 독점하던 공행(公行)의 광쪼우무역 독점권이 폐지되고, 5개 항(꽝조우․아모이․푸조우․닝뽀․상하이)이 개항되었다. 이제 영국인들은 개항장들에서 주거자유와 영사재판권을 누리게 되었다. 청은 그밖에도 홍콩의 할양을 약속하고(1842년에 영국에 조차된 홍콩은 150년 만인 1997년 7월 1일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당시로서는 막대한 금액(2천 1백만 달러 상당)을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했다. 영국은 이듬해에 추가조약으로 보귀(호문)조약을 맺어 치외법권과 최혜국대우 혜택을 얻어냈다.
난징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청은 여타 서구제국과도 통상조약을 잇달아 체결했다. 1844년 6월과 10월에 미국 및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들 역시 무역상의 특권을 포함해 불평등 조항을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관세부과의 자율성, 치외법권, 자유로운 선교권 등을 구미열강들에게 차례차례 주어야 했다(역사마저 왜곡하는가 하면 주변국들의 깊은 우려를 외면하면서 패권주의적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지금의 중국과 비교된다).
난징조약은 그 불평등성을 논외로 치더라도 중국이 바야흐로 유럽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본격적 단계라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전술했듯이 난징조약 이후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이 차례로 중국에 진출했으며 영국도 제2 아편전쟁으로 불리는 애로우호사건(1856~58) 후 다시 텐진조약을 체결하고 중국의 여러 항구들을 추가로 개항시키고 베이징에 공사관을 두게 되었으며 기독교 포교의 자유와 내지 통행권 등을 획득했다. 물론 아편수입은 더욱 자유로워졌으며 급기야 아편흡연을 합법화했으며 아편재배도 허용했다. 이후 중국 내에서의 아편재배가 점차 증가하여 1870년에는 770만근의 아편을 생산했고 1880년에는 4000만근의 아편을 생산해 수입 아편을 능가하게 될 정도였다.
불붙은 뗏목을 적 함대 쪽으로 밀어붙이는 것 말고는 공격수단을 갖지 못한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편전쟁에서 거꾸로 청이 승리했을 경우 중국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물론 서양제국이 동양으로 물밀듯이 밀고 들어오던(서세동점)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는 것은 시간문제였겠지만 적어도 조차라는 이름으로 영토를 굴욕적으로 빼앗기고 상하 국민 모두가 패배의식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편전쟁에서 그처럼 저항다운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힘없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중국은 ‘중화‘의 위엄과 권위를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개방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랬을 경우 중국의 근대화운동이 어느 정도 성공해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반도의 역사도 아마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