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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대중문화계에서 선풍적인 유행을 몰고 온 노래를 들라면, 아마도 모델 출신 가수 손담비가 춤추며 노래한 ‘미쳤어’라는 노래일 것이다. 박자나 멜로디가 단순하면서 반복적인데다가, 의자에 거꾸로 앉아서 한쪽 다리를 돌려 옮기는 기묘한 다리 동작을 곁들인 춤이 얼마간의 파격을 수반한다. 가사도 그렇다. 가벼운 후회의 마음을, 스스로에게 투정하듯 나무라듯, 조금은 나른할 정도로 단조로움을 반복한다. 앞부분 한 대목만 옮겨보면 이렇다.
내가 미쳤어 정말 미쳤어 너무 미워서 떠나버렸어 너무 쉽게 끝난 사랑 다시 돌아오지 않는단 걸 알면서도 미쳤어 내가 미쳤어 그땐 미쳐 널 잡지 못 했어 나를 떠떠떠떠떠 떠나 버버버버버 버려
이 노래는 ‘미쳤어, 내가 미쳤어’를 후렴구처럼 되뇌면서 전개되는데, 허술한 감정 따라 사랑을 만들고 사랑을 정리하는 대중사회의 감정 풍속도를 보여 준다. 헤어짐에 대한 후회를 담고 있지만, 그걸 술에 취해 토로하고 있을 뿐, 그렇게 심각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그냥 ‘미쳤어, 내가 미쳤어’를 반복하는데, 그게 대중의 마음을 끌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미쳤어 내가 미쳤어’라는 말의 현실적 쓰임에 있다. 미치게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는 상당히 심각한 상태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미쳤어, 내가 미쳤어’를 그저 상투적인 자책의 언어로 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말을 노상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미쳤어, 내가 미쳤어’는 일상의 상투어로 더 많이 쓰인다.
그래서 이 노래 제목을 보고서, 상실과 이별이 주는 깊은 상처를 입고, 막막한 회한의 마음으로 존재의 심연에서 번뇌하는 고통으로 받아들이도록 연결되지는 않는다. 현대인들은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부담을 심각하게 주는 것에 대해서는 부담을 느낀다.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 부담을 느끼려 하지 않는 데에 대한 부담을 안으로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크든 작든 그런 정도의 자기분열을 너나 할 것 없이 안으로 감추며 살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시시때때로 우리들은 마음 안에서 ‘미쳤어, 내가 미쳤어’를 중얼거리면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저런 대중들 감수성의 리얼리티를 이해하고서 보면, ‘미쳤어’라는 노래제목은 성공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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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어, 내가 미쳤어’는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자기 자신을 나무라는, 이른바 자책(自責)의 말이다. 사람의 말 중에 가장 진지한 말이 바로 자책의 언어일 것이다. 자책이란 반성의 일종이다. 철학이 만들어 준 용어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바로 ‘반성(reflection)’이다. 반성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인간 정신 작용의 가장 고매한 영역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깊은 감동의 모멘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뼈아픈 자책의 장면들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장수 주유(周瑜)의 자책은 비장미를 느끼게 한다. 중원 천하를 도모하는 계책을 두고 촉나라의 제갈공명과 지략과 다투었던 그는 공명에 대해서 운명적 라이벌의식을 가진다. 여러 고비에서 공명을 꺾으려 하나, 이를 미리 간파하는 공명을 끝내 깨트리지 못한다. 일찍 죽음을 맞게 된 주유는 공명을 이기지 못한 자책의 마음을 하늘에 고하는 방식으로 다음과 같이 한다.
“하늘이여! 이 주유를 내시고 다시 공명을 내시었나이까?”
자존의 감정을 유지하면서 자책을 인정하되 그것을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려는 주유의 마음을 읽노라면 비장의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주유만이겠는가. 누구든 자신을 탓하는 자책의 마음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하늘의 섭리를 생각하기에 이르게 되는 것 같다.
자책의 언어가 한량없이 비감하고 참담하게 다가오기로는 오이디푸스의 토로를 따라 잡을 것이 없다. 운명의 예언을 피해서 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취해 살아 온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그 사실을 알 게 되었을 때, 그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자책한다. 진정한 자책은 그 어떤 형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임을 느끼게 한다. ‘미쳤어, 내가 미쳤어’의 진경이 여기에 있다.
내가 한 일이 잘한 일이 아니라고 가르치지도 말고 충고하지도 마시오. 이 나라도, 이곳에 있는 성벽도, 신전도 다시는 보지 않겠소. 아니오, 아니오, 그럴 수 없소. 할 수만 있다면 귀까지 먹어 보지도 듣지도 않을 것이오. 침묵과 암흑 속에 나를 가두면 더 이상의 슬픔은 없을 테니까. 아, 키타이론 산이여, 어쩌자고 너는 나를 살려냈는가? 오, 결혼이여, 어찌하여 너는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을 뒤섞어 놓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를 구별하지 못하였는가? 입에도 담지 못할 더러운 말을 이제는 더 이상하지 않겠소. 그대들은 어서 나를 나라 밖에 숨겨주오. 나를 죽여주오. 나를 바다 속에 던져주오. 다시는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도록. 자, 가까이 다가와 불쌍한 나를 데려가 주오. 두려워 말고 나를 붙잡아 주오. 나의 죄 짊어질 자 오직 나뿐이니.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중에서> [PAGE BR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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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하는 오이디푸스의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말 그대로 ‘미칠 지경의 마음’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 무겁고 고통스러워서 듣는 이조차도 힘들게 한다. 스스로를 나무라는 일이라면 그 본질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엄중한 자책의 극단은 자결을 불러온다. 나라를 빼앗기던 백 년 전 이 땅의 의식 있는 엘리트들의 자결이 바로 그러하다.
오늘 우리들의 자책은 내가 나를 준열하게 나무라는 자책이라기보다는 그저 남 들으라고 하는 자책 같기도 하다. 핑계를 전달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인 것 같기도 하다. 짐짓 혼잣말처럼 자책인 듯 말하지만 사실은 주변에 들으라고 하는 혼잣말이 되기도 한다. 얄밉다. 자책의 언어를 상투적으로 달고 다니면서 자신의 욕구를 자책으로 표현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그 명품을 놓치다니 미쳤어 정말 미쳤어’ 하는 식이 바로 그렇다.
자책의 본질이 반성에 있고 반성은 인간 정신의 고매한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했는데, 이처럼 자책의 말에 진정성이 사라진다면 그 자책은 거짓 반성일 것이다. 거짓 반성은 위폐보다도 더 사악한 것이다. 거짓 반성은 인간정신의 치부이다. 그래서 자책은 쉽사리 말로 튀어나오지 말고, 마음 그 깊숙한 곳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자책과 반성을 억지로 여러 사람 앞에 요구하는 것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자책을 강제로 요구하거나 그래서 억지로 하는 반성은 그저 정치적 술수에 동원되기 쉽다.
미쳤어, 미치겠다, 등등의 말이 자책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쓰이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이다. 말이 그렇게 되면 정신도 말 따라 미치게 된다. 정상적인 욕망과 후회도 모두 광기 상태로 표현해야 성에 차는 것은 아닌지. 무슨 미칠 일들이 그렇게 일상에 너부러져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우리는 속도 때문에 ‘미쳤어!’를 남발하는지도 모르겠다. 주문하거나 검색하여 금방 대령시켜야 하는 상태가 아니면 미칠 것 같아 한다. 이런 식의 감정들을 대중문화가 풍선에 바람 불어 넣듯 증폭하여 소통시키는 사이에 ‘미쳤어, 내가 미쳤어’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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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대는 대중들에게 너무 자책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인터넷 검색창에 ‘자책의 말’이라는 말을 확인해 보면 그런 경향이 쉽사리 확인된다. 아마도 심하게 자책하여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과 좌절의 나락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보이지 않는 숱한 경쟁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는 경쟁에 밀릴 때마다 자책보다는 기운 내라는 격려가 더 필요할지 모른다. 현대인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과 조건이 너무 복잡하고 피곤하게 되어 있는 세상이니 자책으로는 헤쳐 나갈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탓하는 것이 너무 없어져 가는 세태가 되었다. 자책이 사라진 자리에 핑계의 잡초들이 무성히 자라고, 남 탓만 즐비하다. 무엇보다도 인정이 메말라 각박해진 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공해가 된다.
‘자책하지 말라’는 말은 최선을 다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찾아 자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성공의 자산이 된다. 어찌 보면 자책의 지혜에 이미 도달한 사람들은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자신의 과오에서 성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과오에서 성공의 열쇠를 찾는 법 그것이 바로 내 탓을 인정하는 ‘자책’이다. 자신의 실수로 꼬이고 안 풀리는 와중에서도 “내가 뭘 잘못했는데!”를 연발하는 경우는 딱하기만 하다.
넘치고 모자라는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일이란 것이 꼭 그렇게만 굴러가는 것 같지는 않다. 반성이 필요 없는 사람들에게는 ‘내 탓하기의 자책’이 넘치고, 반성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아예 ‘내 탓하기의 자책’이 실종되어 버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