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이 가을, 간이역과 함께 스러져 가는 우리네 이야기, 폐가처럼 버려진 쓸쓸한 풍경도 새롭게 보면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느린 열차마저 그곳에선 풍경이 되는 경전선 기차여행을 계획했다. 기차로 이동하는 시간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여행이 되는, 최저시속 30㎞로 달리는 가장 느린 기차를 타고 철길 따라 굽이굽이 돌아 흐르면서 느린 풍경의 속살을 내비치는 간이역을 느끼고자 하는 마음이다.
드라마 <여름향기>를 찍었던 보성 명봉역의 아름다운 붉은 벽돌과 화순역 승강장의 소나무가 일품이란다. 이제는 퇴역한 앵남역과 석정리역, 그리고 다솔사역은 각기 또 다른 모습으로 아련함을 간직하고 있단다. 속도가 느리니 시선은 자연히 사소한 곳에 머물게 될 것이고 계절의 냄새는 짙어져 논리의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광주 송정역과 경남 삼랑진역 300.6㎞의 단선 구간을 5시간 40분간 천천히 달리며 40여 개 역에 정차하는 동안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허락’함으로써 ‘한소식’1)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교장 선생님! 달력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보기 힘들게 만들었습니까?” 2009학년도 1학기 ‘학부모와의 대화’ 시간에 각 가정에 배부한 학사일정표에 대해서 어느 학부모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달력의 요일을 가로가 아닌 세로로 배열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디자인이라 불편할 수밖에 없다. ‘창의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해 보고 싶었던 것인데 2010학년도부터는 다시 원위치 할 수 밖에 없었다. 익숙함과 고정관념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기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망치로 내리쳐도 피는커녕 소리도 안 나는 게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생각과 마음은 아는데 몸이 따르지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요즘은 온통, 미래사회는 기술의 차이가 아닌 창의성과 예술성, 디자인 감각의 격차가 모든 것을 결정지을 것이라 얘기하고 있다. 시 · 도교육청 홈페이지의 교육감 인사에서도 ‘창의성’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혹자는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배워왔던 많은 지식들이 창의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라는 말도 하고, “재주 있는 아이도 중 3만 되면 자기가 뭘 잘하는지 다 까먹게 된다”라는 얘기가 학교로 들려온다. 아이들에게 숙제만 요구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이렇듯 이 시대의 화두인 창의성이란 무엇인지 포실한 생각들 몇 가지를 적어 본다.
창의성에 대해 과학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1950년 미국심리학협회(APS)의 회장이었던 길포드(J. P. Guilford)가 창의성에 관한 기조연설을 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창의성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제시되었지만 창의성은 실체가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잠재 능력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적인 개념으로, 그 정의를 내리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