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있네
솔바람이 몰고 와서 살짝 걸쳐 놓고 갔어요 ♬
동요 ‘흰구름’의 한 구절이다. 하도 어린 시절부터 부르던 노래라서 특별히 모르는 단어가 없어 보이지만 ‘솔바람’이 어떤 바람이지? 왜 솔바람이라고 하는 거지? 하는 질문에 이르면 정작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막연히 ‘솔바람’을 소나무 밭에서 부는 바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면 당장 왜 소나무 밭에서 부는 바람이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을 몰고 와서 도망갔을까 하는 논술식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의 결론은 결국 솔바람과 소나무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나무 밭에서 부는 바람이 솔바람’식의 단순한 설명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동요 ‘흰구름’의 ‘솔바람’은 어떤 바람일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솔바람’이라는 단어가 두 단어 등재되어 있다. 하나는 정말 “소나무 사이를 스쳐 부는 바람”이고 다른 하나는 ‘소슬(蕭瑟)바람’의 유의어로 “가을에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주며 부는 으스스한 바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소나무 사이를 스쳐 부는 바람”의 정체도 불분명하거니와 “퉁소나 거문고 소리 같은 외롭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바람”을 뜻하는 ‘소슬바람’(蕭瑟?)’의 뜻만으로는 앞의 노랫말에 나오는 ‘솔바람’의 의미를 정확히 설명해 주지 못한다. 우리말을 집대성한 〈국어대사전〉이 우리말 동요 노랫말 속의 평범한 단어의 뜻풀이 하나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필자는 앞의 노랫말에 나오는 ‘솔바람’의 뜻을 “멀리서부터 가늘고 길게 불어오는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 노랫말에 ‘솔바람’ 대신 ‘실바람’을 써도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을 지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결되는 우리말 단어의 어원들을 몇 가지 소개해 보겠다.
필자는 ‘솔바람’의 ‘솔’을, 지금은 없어진 단어이지만 “끝이 점점 가늘어지다”라는 뜻의 ‘솔다’라는 단어와 관련된 말이라고 본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솔다03’의 뜻으로 “공간이 좁다”를 제시하고 있지만, 이 단어의 뜻을 정확히 말해주는 단어가 바로 ‘오솔길’이다. ‘오솔길’은 ‘올+솔+길’의 구성을 갖는 말이다. ‘오솔길’은 ‘올솔길’에서 ‘올’의 ‘ㄹ’이 ‘솔’의 ‘ㅅ’ 앞에서 탈락한 것이다. ‘불+삽’이 ‘부삽’이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올’은 ‘실오라기’ 그 ‘올’이고 ‘솔’은 “끝이 점점 가늘어지다”라는 뜻의 ‘솔다’의 ‘솔’이다. 그러니까 ‘오솔길’은 “실오라기같은 한 줄기 길이 끝이 점점 가늘어지면서 이어진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볼 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오솔길’을 풀이해 놓은 “폭이 좁은 호젓한 길”보다는 훨씬 잘 이해된다.
솔바람은 ‘멀리서부터 가늘고 길게 불어오는 바람’
<표준국어대사전>의 ‘솔다03’와 관련된 단어로 인천 강화도 인근의 물살이 빠르기로 유명한 ‘손돌목’이라는 지명을 들 수 있다.
고려 23대 임금인 고종이 몽고군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피신을 갈 때의 이야기다. 뱃사공 중에 손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피난 가는 왕을 모시고 뱃길을 서둘렀다. 그런데 왕이 가만히 보니 손돌이 자꾸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물살이 급한 뱃길 쪽으로 노를 젓고 있는 것이었다. 왕은 신하를 시켜 손돌에게 물살이 세지 않은 안전한 곳으로 뱃길을 잡으라고 했지만 손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피난 중이라 마음이 조급해진 왕은 의심을 이기지 못하고 손돌을 배 위에서 참수하고 만다. 죽기 전에 억울함을 호소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자 손돌은 바가지를 하나 내 놓으며 물에 띄운 바가지를 따라 뱃길을 잡으라고 충언한다. 손돌이 죽고 물살이 점점 더 거세지자 고종 일행은 어쩔 수 없이 손돌이 준 바가지를 물에 띄웠다. 바가지는 세찬 물살을 따라 흘러갔고 왕의 일행도 그 뒤를 따랐다. 무사히 뭍에 도착한 왕은 그제서야 손돌의 충심을 알았다고 한다. 이때가 음력 10월 20일경인데 매년 이맘때가 되면 찬바람이 불고 날씨가 추워지므로 이때 부는 바람을 ‘손돌(孫乭)’바람 혹은 ‘손돌이바람’이라고 하고 그 물길을 ‘손돌(孫乭)목’이라고 했다 한다.
이 ‘손돌목’의 한자식 이름은 ‘착량항(搾梁項)’이다. ‘착량(搾梁)’의 ‘량(梁)’은 전통적으로 ‘돌’로 읽히며 ‘도랑’이나 섬과 섬 사이, 섬과 육지 사이의 좁은 길목을 가리키는 차자표기자이고 ‘項’은 ‘목 항’자로 우리말로는 ‘목’을 나타내는 한자이니 ‘착량항(搾梁項)’과 ‘손돌목’의 대응에서 ‘손’의 의미가 ‘搾’임을 알 수 있다. ‘搾’(窄으로도 쓴다)이 ‘좁을 착’임을 고려한다면 ‘손돌목’의 ‘손’은 앞에서 말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솔다03’의 ‘-ㄴ’관형사형임을 알 수 있다. 즉, ‘착량항(搾梁項)’은 ‘솔-[搾/窄]+-ㄴ(관형사형 어미)+돌[梁]+목[項]’의 구성을 가진 말로 “좁은 도랑으로 된 (바닷)길목”의 뜻을 갖는 우리말 ‘손돌목’을 한자로 나타낸 말인 것이다.
이 ‘착량(搾梁)’이라는 지명은 <고려사(高麗史)> 56권(卷) 지(志) 10 <지리(地理)> 부분에 있는 고려 원종 12년(1271)에 몽고 군사들로부터 대부도를 방어하는 내용에 나오는데, ‘손돌’이라는 이름에 앞서 이미 ‘착량(搾梁)’이라는 지명이 있었음을 이야기해 준다. ‘좁은 도랑’이라는 뜻의 ‘착량(搾梁)’이 이미 존재했음을 고려할 때, ‘손돌(孫乭)’이라는 뱃사공 이야기는 후대의 호사가들이 ‘착량(搾梁)’에 대한 우리말 지명 ‘손돌’을 인격화하여 만들어낸 영웅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단어지만, 동사 ‘솔다’는 ‘송곳’의 옛말인 ‘솔옺’에서도 확인된다. ‘솔옺’은 본래 ‘솔+곶’에서 온 말로 “끝이 점점 가늘어지는 꼬챙이”라는 뜻의 단어이다. ‘*솔곶’의 ‘솔’은 한자로 ‘松’이고 우리말 ‘곶(>고지>꼬치)’은 한국식 한자 ‘串[곶]’이므로 ‘*솔곶’은 한자로 ‘松串’으로 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에서 ‘松串’을 본래는 ‘*솔곶>솔옺’으로 읽다가 이러한 전통이 사라지자 한자 그대로 ‘송곶’으로 읽게 되었다. ‘송곶’은 중세 이후 7종성법에 의해 ‘송곳’이 되어 현재에 전한다.
활쏘기의 ‘과녁’, ‘소나무’의 어원도 ‘솔’
활쏘기에서 ‘과녁’이 본래 ‘가죽을 뚫음’이라는 뜻의 한자어 ‘관혁(貫革)’이 입말에서 변한 말이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지만 이 ‘과녁<관혁(貫革)’의 고유어가 ‘솔’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과녁의 고유어인 ‘솔’도 ‘폭이 좁다’는 뜻의 동사 ‘솔다’의 ‘솔’과 상관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소나무의 본래 이름인 ‘솔’도 바로 “이파리의 끝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솔잎’의 모양은 이러한 추정을 믿을 수 있게 해 준다. 이렇게 따진다면 짐승의 털이나 가는 철사 따위를 묶어서 곧추세워 박고 그 끝을 가지런히 잘라서 만드는 ‘솔(=브러시)’도 ‘솔다’로부터 온 말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무엇이 기울어져 어느 한쪽으로 몰리다”의 뜻을 갖는 ‘쏠리다’도 알고 보면 ‘솔다’와 관련된 말이고 “무엇이 그럴듯해 보여 마음이 쏠리는 데가 있다”는 뜻의 ‘솔깃하다’도 결국 ‘솔다’에서 온 말이다.
이렇게 미루나무 꼭대기까지 조각구름을 밀고 올라가서 간신히 살짝 걸쳐 놓고 달아나 버린 ‘솔바람’의 ‘솔’과 마치 송곳처럼 생긴 이파리가 특징인 소나무의 ‘솔’이나 ‘옷솔’의 ‘솔’이 모두 ‘솔다’라는 단어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국어사전은 왜 외면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