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어쥐다’에서 온 ‘거머리’‘거머리’는 다른 동물의 외부에 기생하며 피를 빨아 먹는 지렁이 비슷한 생물이다. 주로 어린 시절에 경험하는 단어이고 그다지 유쾌하지 않아 이 말의 말밑을 고민할 일은 별로 없다. 혹시 이 말에 대해서 그 말밑을 생각해 본다면, 거머리의 몸 색깔이 검붉다는 점에 착안해 이 말이 ‘검다[黑]’에 접미사 ‘-어리’가 결합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거머리 중에는 검붉은색만 있는 것은 아니고 선홍색을 띤 것도 있고 그 종류가 다양해서 ‘검다’는 색깔에서 이름이 왔다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이보다는 ‘거머리’류의 환형동물이 빨판을 가지고 포유류에게 ‘거머쥐듯이’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먹는 일반적인 속성을 통해 이 말을 ‘*검다[捲]’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본다. ‘*검다[捲]’는 ‘감다[捲]’의 큰말로 지금은 없어진 말이지만 중세나 근세까지 우리말에서 널리 쓰이던 말이다. ‘감다’에서 ‘감아쥐다’가 나왔듯 ‘검다’에서 ‘검어쥐다’가 나온 것인데, 다만 현대 국어에서 ‘*검다’가 소멸했기 때문에 맞춤법에서는 ‘감아쥐다’와 ‘거머쥐다’의 차이가 생긴 것뿐이다.
‘거미’도 ‘*검다[捲]’와 관련한 말이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거미’의 말밑도 ‘거머리’만큼이나 그다지 생각해 보지 않은, 아니 생각해 볼 필요 없는 그러한 주제였을 것이다. 우리가 거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거미줄이 있다는 것과 다리가 여덟 개여서 다리가 여섯 개인 곤충류와는 구별되는 별도의 종이라는 것 정도이다. 하지만 ‘거머리’의 말밑을 생각해 본 김에, ‘거미’의 말밑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해 보자.
거미줄에 잡힌 먹잇감을 ‘거머잡는 것’에서 온 ‘거미’
‘거미’는 집이나 숲 근처에서 풀숲이나 나무에 끈끈이 거미줄을 쳐 놓고 오가는 곤충 따위를 잡아먹는 포식자이다. 혹 거머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미’의 어원을 ‘검다[黑]’에서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 포식자의 진정한 말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자연 속의 화려하고 다양한 색깔의 거미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그다지 활동적이지 못한 ‘거미’가 거미줄에서 잡힌 먹잇감을 여덟 개의 다리로 거머잡아서 먹기 때문에 ‘*검-이’라고 하는 것이 이 말의 올바른 말밑이다. 즉, ‘거미’란 ‘거머잡는 것’이라는 뜻에서 온 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거머리’와 ‘거미’의 말밑인 ‘*검다’는 비록 현대 국어에서는 이미 쓰지 않게 된 말이지만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검다[捲]’와 관련한 말로 ‘거멀못’이라는 말도 있다. ‘거멀못’은 ‘벌어져 있거나 벌어질 염려가 있는 곳에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양쪽에 걸쳐서 박는 못’을 말한다. 한자어로 ‘양각정(兩脚釘)’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나무그릇 따위가 벌어져 있거나 벌어질 염려가 있는 곳에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양쪽에 걸쳐서 ‘거머잡아서’ 박는 못을 가리키는 용법으로 주로 사용되던 것으로 지금은 양쪽에 날카로운 못이 있는 ㄷ자형 꺾쇠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거멀못’에 ‘양쪽에 걸치다’는 의미가 더 강하지만 ‘양쪽을 거머잡다’ 혹은 ‘양쪽을 거머쥐다’가 본래 의미이다.
이렇게 우리말에 대한 작은 관심을 통해, ‘거미, 거머리, 거멀못’ 같은 단어들이 ‘거머잡다, 거머쥐다’ 등의 단어와 함께 ‘감다[捲]’의 큰말인 ‘*검다[捲]’에서 온 말들임을 알 수 있었다. ‘감다’와 ‘검다’의 관계는 우리말 모음조화에 따른 ‘큰말-작은말’ 관계와 상관이 있다. 모음조화와 관련한 단어에는 ‘소곤소곤~수군수군’이라든지 ‘아장아장~어정어정’ 같은 의성의태어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뿐만 아니라 ‘남다~넘다’, ‘노랗다~누렇다’, ‘동글다~둥글다’, ‘작다~적다’, ‘졸다~줄다’처럼 실질적인 단어들에서도 이러한 관계는 확인된다.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를 거쳐 현대국어로 오는 동안 이러한 모음조화 체계에 따라 대립되던 많은 단어들이 어느 한쪽이 소멸하면서 하나만 남겨지게 되었는데 ‘넓다’의 옛말인 ‘넙다’와 지금은 없어진 ‘*납다’의 대비도 그중 하나이다. ‘넙치’와 ‘나비’의 대립에서 ‘*넙다~*납다’의 옛말에 있던 모음조화 체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실을 감다, 붕대를 감다’의 ‘감다[捲]’는 지금은 사라진 ‘*검다[捲]’와 작은말-큰말 관계에 있던 말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검다[捲]’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말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겨 놓았다.
‘큰말 - 작은말’ 관계인 ‘검다’와 ‘감다’‘(사람이 물건을) 휘감아 움켜잡다’의 뜻으로 쓰는 ‘거머잡다’와 ‘(물건을) 휘감아 움켜쥐다’라는 뜻의 ‘거머쥐다’가 본래 ‘*검다[捲]’의 ‘-어’ 활용형 ‘검-어’와 ‘잡다[執]’나 ‘쥐다[捲]’가 결합해 이루어진 말임을 눈치 빠른 독자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때의 ‘*검다[捲]’에서 온 ‘거머’는, 현대 국어에서 ‘거머당기다(힘차게 휘감아 당기다), 거머들이다(힘차게 휘몰아 들이다), 거머먹다(이것저것 휘몰아 걷어 먹다), 거머삼키다(이것저것 휘몰아 걷어 삼키다), 거머안다(휘감듯이 안다), 거머채다(휘감아 잡아채다)’ 등 여러 단어에서 확인된다. 이때의 ‘거머’는 모두 ‘휘감다’의 의미를 공통 요소로 갖는다. ‘감다’보다 큰말인 ‘*검다’로부터 유래한 이러한 ‘휘감다’라는 의미로부터 ‘휘몰아, 힘차게’ 등의 의미가 덧붙여진 것을 두고 현대국어의 ‘거머-’가 이미 접두사가 되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거머’라는 말이 현대국어에서 접두사인지 아닌지는 접두사의 정의와 관련해 흥미로운 주제이다.
‘거머’ 계열의 단어 중 ‘거머잡다’, ‘거머쥐다’와 관련된 말로 ‘검잡다’와 ‘검쥐다’ 같은 말도 있다. 대부분의 국어사전에서 ‘검잡다’, ‘검쥐다’는 ‘거머잡다’, ‘거머쥐다’의 준말로 처리하고 있으나, 실상은 ‘검잡다’는 ‘검-[捲]+잡-+-다’가 결합한 말이고 ‘검쥐다’는 ‘검-[捲]+쥐-+-다’가 결합한 말이다. ‘돌보다, 잡쥐다, 검붉다’ 같은 말처럼 동사나 형용사의 어간이 직접 결합한 말을 학계에서는 비통사적 합성어라고 부른다. ‘검잡다’, ‘검쥐다’가 단순히 ‘거머잡다’, ‘거머쥐다’의 준말이 아님은 “풀 따위를 감아쥐면서 뜯다”라는 뜻의 ‘검뜯다’ 같은 말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거머뜯다’가 없어도 ‘검뜯다’ 같은 말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검뜯다’는 ‘*거머뜯다’에서 줄어든 말이 아니고 ‘검-[捲]+뜯-+-다’에서 직접 만들어진 말이다.
거센 힘이 움켜쥐는 모양 ‘검다’, 감각적 의미 드러내는 ‘감다’이렇게 ‘*검다[捲]’ 계열의 단어가 우악스럽고 거센 힘으로 무언가를 움켜쥐는 모양을 나타내는 데 비해 ‘*검다[捲]’의 작은말 ‘감다[捲]’는 비교적 감각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데 사용된다. 맛있는 음식의 맛이 입안을 떠나지 않고 혀를 휘감으며 맴돌 때 우리는 ‘(어떤 맛이) 감돈다’고 하는데 ‘감돌다’의 활용형인 이 말에는 ‘감다[捲]’와 ‘돌다[廻]’의 의미가 합쳐 있다. ‘감칠맛’도 바로 이렇게 ‘입안을 감아 도는 맛’을 가리킨다. ‘거머리’와 ‘거미’나 ‘거멀못’ 같은 낱말의 말밑에서 확인되는 ‘*검다[捲]’와 ‘감돌다, 감칠맛’의 ‘감다[捲]’의 의미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의미를 좀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