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장훈이 부른 노래 중에 <마이 프로필(My profile)>이란 노래가 있다. 가사가 독특해 관심을 끌었던 노래이다. 오로지 재미를 추구한 듯한 노래 가사가 돋보인다. 노래 가사란 원래 노래 분위기를 고려해 만들어진다. 노래 가사는 노래하는 이의 감정을 잘 고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듣는 이도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가사의 내용에 끌리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이 프로필>은 대중이 재미를 느낄 만한 감성을 잘 드러내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가사를 소개해 본다.
내 이름은 ‘너의 남자’
태어난 날은 ‘너를 만난 날’
눈빛 처음 마주쳤던 그 순간
사는 곳은 ‘너의 맘 속’
취미는 ‘너를 그리워하기’
특기는 일생동안 ‘한 여자만을 위해 마음 바치기’
하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너를 지키며 사랑하기’
장래 희망은 ‘너와 둘이서 행복해지는 것’
지금 너의 곁에 그 자리 혹시 비어 있다면
내게 영원히 세내어 주겠니.
늘 함께 살고파 네 곁에서.
재미있다. 내가 살아온 이력(프로필)이 온통 한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도 오로지 한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감정을 토로한다. 거의 극한의 수준에서 이성애의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이보다 더 이상 어떻게 사랑한다는 마음을 지극 정성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 말을 하고 난 후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이 수준을 넘어서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사랑의 감정을 구하는 말로서는 여기가 거의 끝인 것 같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그야말로 ‘종결자’의 경지에 있다고 해야 할까.
얼마 전 차 안에서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 노래를 들었다. 프로그램 진행자가 여러 출연자들을 게스트로 초대해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출연자들이 이 노래에 대한 소감을 다양하게 펼쳐놓았다. 사랑하는 순간의 몰입이 아름답다는 둥,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도 했다. 반론도 있었다. 감정표현의 도가 지나쳐서 현실감이 없다는 둥, 너무 느끼하다는 둥,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가사 속 화자를 두고 “가관(可觀)이다”라고 했다. 비판의 직격탄을 쏜 셈이다. ‘가관’의 원뜻은 ‘꽤 볼 만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즘 이 말을 원뜻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원뜻을 살짝 비틀어 그 반대로 쓴다. ‘가관’을 사전에서 찾아보아도 ‘언행이 보기에 흉하여 비웃을 만하다’는 뜻으로도 쓴다고 밝혀 놓았다. 정도가 지나쳐서 보아줄 수 없거나, 역겨워서 보아줄 수 없을 때, ‘그것 참 가관이다’고 한다. 우리 속언에 ‘눈꼴이 시다’, ‘눈꼴이 시어서 못 봐주겠다’, ‘눈 뜨고는 못 봐주겠다’ 등의 표현이 있는데 이들이 모두 ‘가관’과 상통하는 말이다.
왜 가관이라고 했을까. 이 가사의 말이 너무 지나쳐서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이리라. 지나치게 극대화된 감정은 진실성을 잃기 쉽다는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너무 오버한다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끼면 진정성도 의심이 된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노래는 노래일 뿐 노래로만 들으면 된다”고 말한다. 내 생각에도 그 말이 정답이다. 그런데 노래라는 것도 우리의 생활 감정과 의식을 어느 정도 지배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니까 이걸 가관이라고 한 사람은 노래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이 말의 실제적인 사용을 문제 삼았던 것 같다. 설사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에게 실제로 정색을 하고 평상의 감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우선은 쑥스러울 것이다. 또 듣기에 따라서는 너무 작업용(여성을 감성적으로 꼬이는) 멘트 같다는 느낌을 주기에도 모자람이 없다.
물론 이런 투의 말이 자연스럽게 실현되는 곳도 있다. 아마도 감정 모두를 극단적으로 해방시키는 축제의 자리에서는 가능할 것이다. 또 구혼 프러포즈를 할 때, 이벤트용 언어로는 얼마든지 용납될 수 있겠다. 또 극적 분위기를 조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 상황에서는 있을 법도 하다. 이런 고백을 듣는 여자 쪽에서도 그 순간 감정의 솟구침은 있겠지만,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말이 그렇다는 식으로 이해하는 정도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장면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은 일상의 대화 자리에서는 발현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감흥을 높이는 노래로 드러내는 것이 딱 어울린다. 아마도 회식 마치고 여럿이 함께 간 노래방 같은 데서, 무리 중에 섞여 있는, 그간 마음으로만 좋아했던 여자를 향해, 그것도 술 한 잔 마신 기분으로, 용기 내어 부르기에 적절한 노래일 수는 있겠다. 또 그러라고 이런 노래가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더러는 이 노래가 결혼식 축가로 불리기도 한단다. 결혼식 또한 그런 과장의 언어를, 또는 해방의 언어를 용납하는 일종의 이벤트로서의 일면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일수록, 내가 아끼는 고매한 가치일수록, 쉽사리 노출시키지 않고 오래 오래 마음에 담아두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매일 쉼 없이 꾸준히 다가간다. 남이 몰라주어도 좋다.
하지만 그러기가 쉽지는 않다. 소중할수록 강하게 드러내고 싶다. 최고의 언어로 표명하고 싶다. 가장 고양된 정서로 전하고 싶다. 그래서 내 마음의 이상을 극단의 수사학으로 펼쳐 휘날리는 순간, 나의 그 순정한 이상은 휘발되어 버리기 쉽다. 수사(Rhetoric)는 한번 광채를 발하면, 그 이후로는 퇴색의 얼룩으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것은 현란한 수사의 운명이다. 그래서 다시 그 초심의 열정을 위해 새 말을 준비해야 하는가 그런 고민에 빠진다.
<마이 프로필>의 가사처럼 감정의 극한을 다 쏟아내듯 토로하는 말은 일회용으로 사용할 때만 그 효과 또한 극대화된다. 내 감정 전체를 최상의 진지함으로 모두 쏟아내는 말은 특별한 이벤트를 위해 한 번 사용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벤트 자체야말로 그 속성이 일회적인 것이다. 이벤트는 한 번 딱 하는 것이다. 똑같은 이벤트를 똑같은 대상에게 두 번 할 수는 없다. 이미 한 사람에게 써 먹었던 이벤트를 금방 또 다른 대상에게 그대로 연출하는 것도 신실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딘가 사기꾼 같은 느낌을 주기에 족하다. 이벤트가 일상생활화된다면 그것은 필시 고통에 가까운 것이 되리라.
이벤트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을 일상의 말로 항상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일종의 감동 잉여 현상이 여기저기 생겨날 것이다. 감동의 말이 차고 넘쳐서 어디서나 발부리에 걸려든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감동의 말 자체를 무감동의 표상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감동의 말은 무수히 떠돌아 다녀도, 우리는 한없는 무감동 속에서 권태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더 자극적인 감동의 말을 찾아 나서게 될 것인가.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일상의 차분한 생활들이 자주 이벤트에 휘둘리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이벤트 없는 무미건조한 일상도 문제지만, 이벤트에 뒤쫓기며 매일 이벤트 강박에 시달리는 일상은 더 문제이다. 더구나 사랑의 문제를 이벤트로만 해결하려는 데에 이르러서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니 믿음이니 하는 것도 참으로 공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공허 가운데도 마침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시 한 구절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큰 다행이었다.
진검을 지닌 이
진검 그것 외엔 가진 거 없는 이는
좀체 칼을 뽑지 않는다
한 남자와 한 여자도
사랑한다는 마음의 진검을
평생 동안 아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날에 서로
알고 있었다
<김남조, ‘진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