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인성교육범국민실천연합은 가정의 달을 맞아, 인실련이 추진하는 감사나눔운동의 일환으로 ‘선생님·학생·학부모 자랑 글쓰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본지에서는 이 대회 수상작을 소개할 예정이며 이번 호에서는 ‘학생부문 작품’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남지현 청주 사천초 교사의 글을 소개합니다.
처음으로 연구부장을 맡으며 시작된 고된 학교 일상 속에서도 떠올리면 행복해지는 얼굴들이 있다. 바로 나의 소중한 제자들의 얼굴이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나의 소중한 제자들은 전근 간 선생님 얼굴 하나 보겠다고 왕복 1시간 거리를 걸어 그토록 내가 보고 싶던 환한 미소를 보여주려고 온다. 2010~2012년 연속 3년 동안 5학년을 지도한 나는 교직경력은 14년 차지만 사실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최선을 다해 지도한 지는 겨우 4년 차기에 아직도 햇병아리 교사다.
2007년 둘째 아이를 출산하고 난 뜻밖의 병에 걸렸다. 산후풍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 병에 걸리고 3년여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한여름에도 내복을 입고 수면양말을 신고, 매달 60만 원이 넘는 한약을 먹으며 매주 지방에서 서울까지 침을 맞으러 다녔다. 매일 쑥뜸을 뜨며 바깥바람만 살짝 쐬어도 살갗이 쓰리는 고통을 겪었다. 물론 차가운 물은 입에도 댈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과 차가운 음식은 근처도 갈 수 없었기에 난 매일매일 좌절감을 느꼈다.
한방, 양방에서도 모두 명확한 치료법을 몰라 고개만 갸우뚱하고 있었기에 공포심은 커져만 갔다. ‘과연 내가 교사를 할 수 있을까?’, ‘일상생활도 불가능한 내가 과연 체육 수업은 할 수 있을까?’, ‘다시 내가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투병생활은 2000년 임용고시 수석합격으로 우쭐함이 극에 달했던 나에게 ‘학교로 돌아갈 수나 있을까?’ 하는 절망감만 가득 안겨주었다.
3년여 동안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비록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복직을 한 후 내가 바라본 학급 아이들은 이전의 아이들이 아니었다. 교사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던 나에게 “선생님”하며 다가오는 아이들은 감사함 그 자체였다.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과거엔 학교란 곳이 나에게 직장 그 이상이 아니었다면 투병 생활 이후의 학교는 나에게 소중함 그 자체였다. 열심히 교재 연구를 해서 수업 시간에 지루함을 없애주고 싶었다. 나는 30명 아이들 하나하나와 상담을 하며 일상의 이야기를 나눠 아이들의 고민을 함께해 주었다. 또한 월별 생일파티, 교실올림픽, 미션! 보물찾기, 풍선 운동회, 요리 콘테스트 등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선사해 주고 싶어 다양한 활동을 기획했으며 그 모든 활동들을 우리 반만의 학급문집을 발간해 간직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2010년 복직한 후 지금까지 나의 제자들은 입을 모아 나와 함께 했던 그 해를 소중하게 기억해 주고 있다. 선생님이 자신들을 위해 헌신했던 모습들을 기억하며 나와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이 가장 좋았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교직의 가장 큰 자랑은 나의 학생들을 ‘제자’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투병생활은 나에게 교직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아이들에게 보다 좋은 선생님이 되도록 나를 발전시켜주었다.
2010년 3월 2일은 나의 소중한 제자 1호와의 만남이 있던 날이다. 사실 2월 말에 미리 반 아이들 명단을 받아 어떤 아이들을 만나게 될지 대강은 파악한 상태였다.
명단을 받은 그 2월 말 난 깊은 시름에 젖었다. 우리 반에 A라는 유명한 명물이 있는 것이었다. 4학년밖에 안 된 녀석이 교장 선생님께 의자를 집어 던지고 교장 선생님 뺨까지 때려 코피를 흘리게 만들었다는 최고의 명물. 정말 감당하기 두려운 상대였다. 우리 반 명단에 A라는 아이가 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며칠간은 너무 속상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기선제압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들을 처음 만나는 날 인상을 쓰고 교탁에 섰다. 이름 하나하나 호명하며 일어나서 자신을 소개하도록 했다. 역시나 A는 만만치 않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것은 물론 내가 화를 내며 나오라고 하니 나오지도 않았다. 한 달여 간을 매일 상담하며 A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A는 매일 학교에서나 집에서 맞고만 자라서 나에게도 맞을까 두려워 일부러 내 말을 거부하며 강하게 나왔다고 했다. 선생님은 A를 사랑하며 절대 때리지 않는다고 안아주면서 안심시켰더니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A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던 3월 생일파티 시간에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친구들의 축가를 듣고는 하염없이 울었다. 새삼 학급에서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었나 보다. 그런 A를 바라보는 내 눈시울도 참 뜨거웠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들면 욱해서 발길질부터 하던 다혈질 싸움꾼 B, 절대 지는 건 못 참고 뭐든지 자기가 이겨야만 하는 C 등 우리 반 대부분의 아이들은 꾸준한 관심과 사랑을 통해 문제행동이 많이 좋아졌으며 무슨 일이 있으면 선생님부터 챙기는 나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다.
스승의 날과 내 생일 이벤트는 물론 2월 종업식 때는 선생님을 위한 파티를 더 정성껏 준비해 보겠다고 새벽에 학교까지 왔다. 그런데 학교 정문이 잠겨 있어 1시간은 오들오들 떨었다며 웃음 짓던 5학년 7반 아이들을 생각하면 고마움과 미안함이 교차한다.
2011년 나의 제자 2호가 탄생했다. 5학년 5반은 다시 생각해도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재치면 재치 모든 게 완벽했던 반이었다. 무척 운 좋게 반편성이 돼 옆 반 선생님들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다.
시험만 봤다하면 올백이 쏟아지는 것이었다. 다른 반은 올백이 없을 때도 많은데 말이다. 학급 대항 피구대회에서도 늘 우승을 차지했으며 뭐 하나를 가르쳐 주면 늘 업그레이드해 최고의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그 완벽한 반에서 3월 한 달 내내 지켜본 결과 D는 유일하게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녀석이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만 하면 늘 태클을 걸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