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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바라기’ 이미성 분당 서현고등학교 교사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고등학생들에게 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교사가 있다. 입시 부담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학문을 연구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인문학 수업은 개설 4년 만에 서현고의 대표 강좌로 떠올랐다. 이미성 교사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무엇인지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입 앞둔 고교생에게 인문학 설파
“성찰하는 힘 키워 인격 성장 도와요”


 “공부는 잘하는데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꽤 많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인문학을 떠올렸어요. 인문학의 가장 큰 장점은 의심하고 성찰하는 힘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거든요. 바로 이거다 생각했죠.”

이미성 국어교사는 인문학 예찬으로 말문을 열었다. 학생 생활지도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그는 인문학 강의라는 묘안을 짜냈다.

곧바로 수업을 개설하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1학년 2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 교사는 매주 화요일 정규수업이 모두 끝난 오후 6시부터 세 시간씩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은 철저하게 대학의 강의 방식을 따랐다.

“매 수업시간마다 3명 정도의 발제자를 선정했어요. 발제자들은 책의 내용 요약뿐만 아니라 토론하고 싶은 주제를 직접 뽑아와 나머지 학생들과 공유해요. 발제자가 준비해 온 토론 주제를 가지고 조별로 본격적인 토론이 진행됩니다. 조별 토론이 끝나고 나면 토론 내용을 취합해 또 다시 전체 토론으로 이어가요. 저는 토론에 직접 관여하지 않아요. 그저 학생들이 토론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핵심을 짚어주고 정리해주는 역할입니다.”

책은 매주 한 권씩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분량이 많거나 내용이 어려운 책은 2~3주에 걸쳐 읽도록 했다. 이 교사의 추천 도서와 학생들이 관심 있어 하는 분야의 책들을 고루 분배했다.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소설에서부터 인문·사회·과학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이 선정됐다.

희망자에 한해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인문학 수업을 들은 한 여학생은 “그동안 나는 쉽고 재미있는 책만 골라 읽는, 이른바 소비적인 독서를 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2010년 개설 이후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4년 만에 서현고의 인기 강좌로 자리매김한 이 수업은 바로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달인’이다.

문제풀이식 수업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도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는 학생들에게 수능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인문학 수업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는 학생들과 학부모의 반대가 심할 것이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문제풀이식의 수업을 진행해온 이 교사 역시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도가 걱정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전 학교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수업을 했어요. 그러다 2010년 서현고로 전근을 오면서 본격적으로 인문학 수업을 진행했죠.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해 선택제로 방과후 수업이 운영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학교 측에서도 저를 믿고 마음 편히 수업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고요.”

학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처음 접하는 수업 방식에 “흥미롭다”며 호응을 보내는 학생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어려움을 토로했다. 게다가 제목에서부터 딱딱하고 난해한 책들은 학생들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줬다. 이 교사는 인문학이 힘들고 때로는 지루한 학문임에 공감하면서도 “반복해 훈련하다보면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될 것”이라며 학생들을 격려했다.

“인문학 도서들은 끊임없이 생각을 하도록 유도해요. 그래서 막힘없이 술술 읽기란 쉽지 않아요. 그럴 땐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 돼요. 한 권의 책을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세 번 읽을 때는 전혀 다르거든요. 책을 통해 느낀 점도 다르고, 앞서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이 보이게 되면서 이해의 폭도 넓어지죠.”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은 점차 자신감을 찾고 수업을 즐기기 시작했다. 수업이 진행되는 세 시간 동안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모처럼 시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며 인문학에 한 발짝 다가섰다. 자녀의 변화를 체감한 학부모들은 이제 이 교사의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국어교사를 꿈꾸던 사춘기 소녀
지금은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국어교사이지만, 그의 학창시절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처럼 우울하고 캄캄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 장애인 아버지, 설상가상으로 중학교 때 어머니까지 여의면서 그는 모든 의욕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사춘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버거운 현실 속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돌파구는 독서였다.

“장르 불문하고 밤낮으로 책을 읽었어요. 심지어 수업시간에도 교과서 밑에 몰래 숨겨놓고 읽을 정도였으니까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던 그 때 저의 유일한 동경의 대상은 국어선생님이었어요. 책을 좋아하는 제게 국어교사는 운명처럼 느껴졌죠.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뒤늦게 국어교사가 되기로 진로를 결정하고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고 이 교사는 교수들로부터 책 읽는 법과 공부하는 방법 등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워나갔다. 자연스레 양서를 고르는 안목도 생겼다.

“제가 존경하는 교수님 한 분은 당신이 하는 일에 회의가 들 때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다시 꺼내 읽는다고 하시더군요. 평생 동안 같은 책을 수없이 반복해 읽으셨다는 말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제가 여러 스승님들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듯이 저 역시 제자들에게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는 좋은 교사이고 싶어요.”

인문학 덕에 논술전형 합격생 늘어
인문학 강의를 시작한 지 4년째, 수업을 진행할수록 학생들의 태도에도 조금씩 변화가 보이고 있다. 이기적이고 배려가 부족했던 아이들이 점차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고의 폭이 확장된 것은 물론, 소논문을 직접 작성할 정도로 글쓰기 실력도 향상됐다.
 
2010년 당시 수업을 들었던 1학년 학생들은 올해 초 대학에 진학했다. 2~3년 간 이 교사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 가운데 상당수가 논술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하는 성과를 이뤘다. 입시 부담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학문을 연구하자는 취지로 개설한 인문학 수업이 결국 입시에서 빛을 발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졸업생 몇몇이 “인문학 수업이 대학 강의를 듣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이 교사를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책을 읽고 난 후 스스로 결론을 도출하고 이야기를 구성해내는 훈련이 되어 있는 학생들은 대학 생활도 성공적으로 보낼 수 있어요. 이런 학생들은 사회에서 원하는 인재상과도 일치합니다.”

세상 모든 책의 장르는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이 교사는 말한다. 그는 “인문학이라고 하면 무조건 어렵게만 생각하는 것이 사실”이라며 “읽기 쉬운 책들 가운데에도 인문학적 생각을 유도하는 책은 매우 많다”고 조언했다.

“저는 학생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이 참 즐거워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학생들을 통해 알기도 하고요. 앞으로도 인문학 수업은 계속 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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