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크리스마스가 지났다. 예전에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저녁 열두 시부터 새벽 네 시까지는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 시절 누구나 하루 24시간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것이 1년 중에 12월 24일과 해가 바뀌는 12월 31일의 저녁 딱 이틀뿐이었다. 야간 통행금지령이 해제된 것이 올림픽이 치러지던 1988년이니까, 우리나라에서 밤에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게 된 것은 불과 25년밖에 되지 않는다.
수척해진 아이 크리스마스 무렵만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과 ‘올리버 트위스트’다. 하지만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었던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동화책에서 얻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조금 다른 기억이 있다. 어느 시골에서 하급관리로 일하는 가장이 집으로 돌아와서도 밤늦게까지 종이를 접고 풀을 붙여서 만든 봉투를 팔아서 생계를 보탰다. 생활이 궁핍하고 고달팠지만, 어머니도 없이 혼자 키우는 아이가 튼튼하고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버지의 자랑이자 삶을 지탱해주는 희망이었다. 어느 날 밤, 늦게까지 숙제를 하던 아이는 봉투를 만들던 아버지가 책상에 머리를 대고 깜박 잠이 든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이는 아버지 등에 담요를 덮어주고, 책상에 쌓인 종이를 서툰 솜씨로 접어서 풀을 붙이고 봉투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봉투를 본 아버지는 자신이 아직 한참 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렇게 매일 밤 새벽까지 봉투를 만드는 아이는 점점 수척해졌다. 가정 방문을 한 선생님으로부터 아이가 예전과 달리 학교에서 자주 졸고 성적도 자꾸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아이의 장래에 걸었던 희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노한 아버지의 회초리에 종아리를 맞으면서도 아이는 한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우연히 눈을 떴을 때 책상에 앉아서 봉투에 풀을 바르고 있는 아이를 본 아버지는 아이를 가슴에 꼬옥 안고 울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창밖에서는 눈이 소록소록 내려 쌓이고 있었다. 제목도 작가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지만,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읽었던 동화의 내용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조건 없는 사랑 천사가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이들이 모두 천사이기 때문이다. 부화해서 처음으로 만나는 대상을 어미로 여기고 따르는 오리 새끼처럼, 모든 아이들은 부모에 대해서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 아직 생존능력이 갖춰지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부모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생물학적인 관점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단순한 본능적인 생명유지의 방법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지고 성장해나가기 위해 가꿔나가야 할 가장 소중한 덕목인 것이다. 엄마 아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얼굴에 웃음을 띤다. 싱크대에 빈 그릇을 수북이 쌓아놓고 TV 드라마만 보는 게으른 엄마도, 벌이가 시원치 않은 주정뱅이 아빠도 아이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랑한다.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면 엄마를 더 좋아할게’, 또는 ‘돈을 더 많이 벌어오면 아빠를 사랑할게’ 그렇게 조건을 붙이는 아이도, 요구하는 아이도 없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에 대한 부모나 어른들의 사랑은 다르다. 아기 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했던 아이를 언제부터인가 ‘공부를 더 잘한다면, 말을 잘 듣는다면, 피아노를 지금보다 잘 치게 된다면, 영어를 좀 더 잘하게 된다면……’하고 조건을 붙이게 된다. 그런 사랑이 참사랑일 수 없다. 무조건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그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아이가 무엇을 잘하거나 잘못하거나에 상관없이 언제나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마음이다. 친구를 짓궂게 놀리는 아이도 놀림을 당하는 아이도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어느 시기까지는 ‘얘야, 나는 네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야. 네가 세상에서 둘도 없는 내 아이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보다 소중한 거란다’라는 메시지를 말과 행동으로 끊임없이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메시지가 충분히 전달되고 부모나 교사들의 조건 없는 사랑을 아이들이 믿게 된다면 비록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아도 아이의 성격이 비뚤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개성과 가능성을 가진 아이들을 계량적인 기준에 따라서 변별하는 것이 옳은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은 성적이 좋은 아이보다는 지난번보다 1점이라도 더 잘 받으려고 노력한 아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도 100점을 받아오다니, 내가 생각했던 대로 너는 정말 머리가 좋은 아이구나”라는 칭찬을 들은 아이는 점수가 떨어질 경우, 엄마를 기쁘게 만들어줄 수가 없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그들의 행동이나 행동의 결과에 대한 보상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이들의 성격 형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아직 심리적으로 자립하기 전의 아이들은 오직 사랑을 받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다. 영어회화도 피아노도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을 받고 싶기 때문에 괴로움을 참으며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사춘기를 맞고 자기를 주장하게 될 즈음이면 자신을 ‘지배’해 온 어른들에게 반발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불안과 분노에서 자포자기 행동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다.
체벌은 좋은가? 교육 과정에서의 체벌 효용성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나는 학교에서 경험으로 폭력적인 방법의 가르침에는 웬만큼 단련된 편이다. 그때의 체벌은 보통 손바닥을 자로 때리거나 구부린 검지로 관자놀이를 찍어서 빙글빙글 돌리거나 양쪽 귀를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뺨을 맞거나 머리를 주먹으로 맞았던 중학교 때의 체벌은 트라우마로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릴 때면 당시에 내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후회보다도 강한 모멸감이 되살아나곤 한다. 애정이 애정을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폭력은 폭력을 낳고 증오는 증오하는 마음을 키우게 된다. 두려움과 고통을 수반한 교육은 역효과다. 체벌로 아이를 가르친다면 아이는 우선은 체벌을 가하는 사람의 뜻대로 만들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체벌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일 뿐, 결국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거나 요령을 피우거나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수동적인 성격으로 굳어져 버리게 될 것이다. 아이들이 감정에 쉽게 치우치지 않고 압박에도 굴하지 않는 강한 분별력과 독립심을 가지게 만드는 데 체벌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