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하는 논쟁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라는 질문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문제이다. 태어나면서부터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역사에 ‘처벌’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전적 처벌부터, 평생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 아직까지도 논란의 핵심에 있는 사형제도까지 인간이 저지른 잘못에 상응하는 벌 역시 진화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형벌의 역사적 접근과 쟁점에 대한 토론을 하면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법을 왜 준수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자.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든 악하게 태어나든, 아니면 백지로 태어나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든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살아간다. ‘죄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엄청나게 복잡한 맥락의 해석이 각기 다르게 적용되지만, ‘악한 마음으로 체제 혹은 개인에게 해를 가하는 일’이라고 답할 수 있다.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가장 많은 신도를 거느린 종교에서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고 하지 않던가…. 당장 오늘 하루의 일들만 돌아봐도 크고 작은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지 부끄러워진다. 인간의 본성을 악(惡)한 것으로 본 대표적인 인물은 순자와 한비자이다. 그러나 ‘죄 짓는 악한 인간들의 집합체인 사회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이 둘의 해법은 다르다. 순자는 인간의 악함은 예(禮)를 통해 바꿀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한비자는 악함의 근원은 바꿀 수 없으므로 엄격한 법(法)을 통해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죄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이 넘는 과거의 한비자가 주창한 법가는 오늘날 대다수 국가에서 유효한 생각으로 적용되고 있다. 인간이 짓는 죄의 수에 상응하는 법을 만들어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소속되어 있는 국민이 지켜야 할 법률과 이를 어겼을 때 받게 되는 처벌은 그 사회를 유지하는 데 있어 빠질 수 없는 핵심요소이다. 아니 법치주의가 아니더라도 처벌은 인간이 혼자가 아닌 집단으로 살아가면서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된 수단이다.
오늘날에도 형벌에 관해서는 늘 논란이 된다. 작게는 학교에서의 체벌부터 크게는 사형제도의 찬반에 이르기까지 팽팽한 쟁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쉽게 해결이 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양극단의 생각에 타당하고 강력한 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를 인간이 판단하고 단죄할 수 있느냐는 입장에 있다가도 잔인한 범죄가 일어난 후 재발되었을 때 강력한 처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탄하며 처벌의 수위를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들과 함께 형벌의 역사적 접근과 쟁점에 대한 토론을 시도해본다면 우리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며,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법을 왜 준수해야 하는지, 처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 돋보기 우리 역사에서도 역사적 기록이 시작된 이래로 형벌에 관한 내용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새교육에 있습니다]